여름을 닮은 아내 - 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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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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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닮은 아내 - 하편

억수같이 퍼붓는 장대비,

분명 여름의 소나기라 금방 그칠 것 같던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이미 흠뻑 젖어버린 내 몰골,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내 삶의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 같은 이 순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몸을 두들기듯이 퍼붓는 비를 맞으며 그냥 걸었다. 정처 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앞으로 걸었다. 발이 닫는 곳으로 그저 한참을 계속해서 걸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끝이 보이겠지.. 그 끝엔 뭐가 있을까...



그리곤 흐려지는 의식..

머리가 핑 돈다.

어제부터 불안감에 시달리며 거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계속 비를 맞고 돌아다녀서 그런 것일까..

좀처럼 몸에 균형을 잡고 바로 서려고 해도 몸이 자꾸만 마음대로 비틀거린다.



“어...어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내 몸.. 그리고 하늘이 보였다.

끊임없이 퍼붓고 있는 비 사이로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파란 하늘..

지긋지긋하게 퍼붓는 비가 그치려는 모양이다.

이제 비가 그치고 해가 나겠지...



갑자기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 상황에서 무슨 웃음이 나오는 건지..

아마도 난 지금 길바닥에 쓰러져 하늘을 보며 누워 있을 건데..

이게 왜 그리 웃음이 나는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웃음이 흘러 나왔다. 언제 이렇게 즐겁게 웃어봤을까 싶은 시원한 웃음소리가..



“햇살이 너무 뜨거운 거 같지 않아? 안으로 들어가자”

“아니 괜찮아. 너무 좋은 걸.. 난 여름이 좋아. 그리고 이 뜨거운 햇살이 좋아. 뭔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잖아. 이런 느낌이 너무 좋아...”

“그래..? 하긴 너랑 잘 어울린다. 그런데 어쩌냐..난 봄이 더 좋은데...”

“봄? 봄..흐음...봄은 뭔가 좀 나른하고 그렇지 않아? 막 잠 올 거 같은 그런 느낌인데...너무 편안해서 말이지..”

“뭐..그렇지..근데 봄이 오면 느껴지는 그런 설렘 있잖아. 모든 생명이 시작되는 계절이라는 느낌...

뭔가 새로운 인연이 생길 거 같고.. 모르겠어..그런 느낌이 좋아..”

“아...무슨 말인지 알 거 같다. 그러고 보니 넌 봄을 닮았네..”

“응....?”

“넌 날 설레게 하는 사람이잖아....”



내 입술에 닿는 촉촉한 은주의 입술 감촉..

100일이라며 처음으로 함께 1박2일로 강릉으로 여행을 떠나서,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닷가와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은주의 처음으로 나눴던 첫 키스..

그 느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눈물이 흘러 나왔다.

분명 행복한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왜..왜 눈물이 나오는 것인지..



은주는 조심스레 입술을 떼며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곤 천천히 바닷가로 걸어 들어갔다.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가지마...가...가지..마..은주야...은주야....!!’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미 목까지 물이 차있는 곳으로 은주가 들어가고 있는데, 어서 은주를 데려와야 하는데..

조금도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고, 조금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왜..왜 그리 환하게 웃으면서 바닷가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거니..

이렇게 애가 타면서 목 놓아 부르고 있는데..왜 날 두고 그렇게 들어가고 있는 거니..

하지만 조금도 멈추지 않는다. 이제는 눈만 겨우 보일 정도로 바닷가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은주는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봤고,

그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은주야.....!!!”

“이철민 씨, 이제 정신이 좀 드세요?”

“네...? 여기는...”



병원이었다. 난 4인 병실에 홀로 누워 있었고, 내 앞에 있는 간호사는 내가 깨어날 걸 보자 의사를 부르러 나가고 난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끊어진 의식의 흐름을 떠올려보았다.

집에서 비를 맞으며 한참을 정처 없이 걸어가다 머리가 핑 도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쓰러진 기억이 떠올랐고,

그 의식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 기억은 점점 비가 그치고 맑아져 오는 파란 하늘이었다.



‘그래...하늘....’



그리고 이어진 슬픈 기억..

은주와 첫 키스를 나눴던 그 순간을 꿈을 꿨던 것 같다.

지금 다시 떠올려도 너무나 달콤한 그 느낌은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은주와 키스를 나눴던 그 뒤의 꿈이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냥 무작정

슬프다는 생각이 들고,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뭘까, 도대체 무슨 꿈이었길래.. 이렇게 슬픈 건가..

하지만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흘러내릴 뿐.. 아니 울었다. 아이처럼 서럽게, 너무나 서럽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한참을 나는 서럽게 소리를 내어 울었다.



이렇게 울고 나면 속이라도 시원해지지 않을까..

기억나지 않는 꿈이 조금이라도 기억나지 않을까..



병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와 담당의사인 듯한 사람이 들어왔다.

갑작스레 울고 있는 내 모습에 당황한 간호사는 어디 아픈 곳이 있냐며 잔뜩 긴장된 얼굴로 물어왔고, 난 아무런 말없이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진찰과 질문들,

혈압과 맥박, 피검사, 소변검사 등은 모두 정상이라 했고, 의사는 이것저것 나에 대해 물어봤고

나는 멍한 정신 상태에서 그냥 아무렇게나 입에서 나오는데로 뭐라고 떠들어 댄 것 같은데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지금 컨디션이면 이틀 정도 더 쉬고 퇴원을 하면 될 거라는 말과 함께 병실을 나갔고,

간호사는 내 휴대폰이 완전히 젖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완전히 화면이 나가버린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나갔다.



다시 혼자 남은 병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기운이 병실 안을 감돌면서 내 마음은 차분해지며 좀 전까지의 행적들을 떠올리며 하나씩 정리했다.

은주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홍콩 출장을 갔던 일 그리고 비로 인해 이틀 더 홍콩에 머무르며 홍콩에서 맞을 수밖에 없었던 은주의 생일,

그 날 받았던 술 취한 은주의 목소리. 그리고 그 남자..

그리고 이젠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서울에 돌아와서 있었던 고작 몇 시간동안의 끔찍한 기억..



어떻게 그렇게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박살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이뤄왔던 모든 것이 어찌 그리 허망하게 모두 부숴 질 수 있을까...

난 정말 욕심을 내면서 살아온 적이 없었는데, 정말 한 순간에 내 모든 것이라 생각했던 그 사람과의 신뢰가

손에 쥐고 있던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버리듯이 그렇게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9년간 쌓아왔던 은주와의 신뢰가...



“하아.......”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혼을 한 것도, 돈을 버는 것도, 내 미래에 대한 계획도.. 모두 은주를 위해 맞춰놓고 살고 있었다.

내 인생은 모조리 은주의 것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컸던 그 사람이 이젠 내 인생에 없는 존재가 될 거란 생각이 들자

도무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틀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이틀을 보내고 다가온 퇴원 날짜,

퇴원수속을 밟고 병원 밖으로 나와 우선 휴대폰을 새로 개통하고 난 무작정 강릉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일단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왜 강릉으로 발길이 향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꾼 꿈이 강릉에서의 추억이라 그런 것일지,

아직 완전히 은주를 정리하기엔 내가 모질지 못한 놈이라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차창 밖으로 이어지는 풍경, 여름의 따가운 햇살 속에 푸르른 수풀 등을 보며 무언가 마음의 안정이 들려는 찰나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새로 산 휴대폰이 익숙치않아 처음엔 다른 사람 벨소리인 줄 알았다.

앞에 있던 사람의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라는 외침에 난 그게 내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대폰 벨소리라는 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남자를 향해 조심스레 사과를 하고 주머니를 꺼내 휴대폰을 보니 두 글자의 이름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은주..

난 차마 전화를 받을 수 없었고, 무음진동으로 바꾸고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지금 전화를 받아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 문뜩 회사까지 생각이 미쳤고, 그제야 내가 무단결근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완전히 미친 짓을 하고 있단 사실을...

일단 전후사정이라도 이야기해야 했기에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의 신호 후 바로 들려오는 팀장의 목소리.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팀장은 정말 걱정스런 목소리로 내 안부를 물었다. 지금 어디냐고, 회사에 제수씨 찾아오고 난리도 아니였다고.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회사도 안 나오고 제수씨가 찾아오고 그러냐면서...



순간 은주가 회사까지 찾아왔다는 말에 가슴 속에서 울컥 무언가 올라오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왜 눈물이 나온 건지..

난 가까스로 눈물을 참으며 잠시 몸이 안 좋아 쉬어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이주일 아니 그것도 안 되면 일주일만 쉴 수 있냐고 물어봤고, 팀장은 고맙게도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고 올 때가 되면 말해달라고 이야기했다.

회사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본인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다고..



입사 후 처음으로 난 진심으로 팀장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팀장은 일이나 잘 마무리 하라고 고마울 것 없다는 이야기를 했고 팀장과 나의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도착한 익숙한 풍경의 버스터미널, 아무런 짐도 없었기에 난 가볍게 버스에서 내려 익숙한 걸음걸이로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

늘 타던 것처럼 버스에 올라타고 은주와 다섯 번이나 왔던 그 바닷가로 향했다. 우리의 많은 추억이 묻어져 있는 그 곳으로..

한참을 달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니 벌써부터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시원한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난 한달음에 바닷가를 향해 뛰어갔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나를 기분 좋게 맞이해주었다.



눈부시게 뜨거운 태양, 시원스레 펼쳐져 있는 백사장과 끝없이 해변으로 밀려와 부딪히는 파란빛 파도까지...모든 게 그대로였다.

은주와 처음 왔던 그때부터 마지막으로 왔던 3년 전 그 날까지..



은주는 여름만큼이나 바다를 좋아했다. 우린 많은 것이 달랐는데 그 중 하나가 좋아하는 휴양지였다.

난 산을 좋아했지만 은주는 늘 입버릇처럼 바다가 좋다고 말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를 보고 있으면 속이 뻥 뚫린 것처럼 너무나 좋다고..

자기도 바다를 닮아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항상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난 너무 속이 좁아서 안 될 거야..그치?”

“뭘...너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

“괜찮은 걸 떠나서 난 속이 좁잖아. 잘 삐지고..너는 산을 좋아하지만 네가 정말 바다를 닮은 사람인 거 같아.

항상 날 잘 포용해주고..내 잘못도 감싸주고..그래서 네가 참 좋아...”

“그래...나두 네가 좋아...”



모든 게 모든 게 다 그대로인데 한 가지가 없었다.

지난 추억까지 모두 다 가지고 다시 돌아왔는데 내 곁에 있어야 할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내가 버려두고 왔다는 편이 옳은 표현일까...



다시 울리는 벨소리, 은주였다.

받아야 될까, 받지 말아야 할까, 잠깐의 찰나 마음속으로 수많은 번뇌가 오고 갔고 결국 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여보세요..자기야..자기야..말 좀 해봐..자기야....”



보지 않아도 잔뜩 초췌해진 듯한 모습의 은주가 그려졌고, 울먹이는 은주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순간 가슴을 칼로 베인 듯 가슴이 미어왔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어....”

“어디야..어디냐고...얼굴 좀 보면서 얘기해...”

“하아.....나를 찾을 수 있으면 그때 얘기하자...”

“자기야..자기야..철민씨...철민씨.....!”



은주의 애타는 외침을 뒤로 하고 나는 조심스레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

더 은주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내가 붙잡을 것만 같아서, 그런 바보 같은 모습을 차마 보일 수 없어 비겁하게 난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리곤 바보처럼 또 다시 서럽게 울었다.

한참을..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도무지 멈추지 않는 울음은 어느새 해가 지고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는 와중에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내 몸속에 있는 모든 수분을 다 눈물로 바꾸기라도 하듯 하염없이 내리던 눈물은 뒤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드디어 멎었다.



“철민 씨......”



은주, 은주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여기를 찾아왔을까..

난 오랜만에 듣는 은주의 목소리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고, 뒤돌아 은주를 보는 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환하게 웃으면서 맞아야 할까, 바보처럼 이런 우는 모습으로 맞으면 되는 걸까,

다시 은주를 보고 내 맘이 눈 녹듯 녹아내리면 어떡해야 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내 머리에 복잡하게 뒤엉키고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은주는 뒤돌아 서 있는 나의 뒤로 와락 안겼고, 은주는 그 날 빗속에서 버리고 온 그 날처럼 내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다.



“왜...왜에....나 정말 못 보는 줄 알았어..이제 다시...이렇게..영영....”



은주는 날 잃을 뻔 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한여름이었음에도 정말 사시나무 떨 듯이 떨면서 날 안고 있었다.

안쓰러움...그런 은주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안쓰러움이었다. 당장이라도 뒤돌아 은주를 꼭 안아주고 괜찮다고 달래주고 싶었다. 이제 울지 말라고..

하지만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은주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면 그 날이 떠올라 다시 화가 나게 될까봐..

정말 그럼 이제 영영 은주를 완전히 잃게 될까봐..



아직..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아직 은주를 볼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빨리 은주를 다시 보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제야 후회가 됐다.

왜 은주가 이곳을 기억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까, 우리의 추억이 가장 많이 담긴 이곳을 어떻게 은주가 기억 못할 것이라 바보같이 그렇게 생각했을까..

하지만 뒤늦은 후회일 뿐, 은주는 지금 이미 내 앞에 와 있었다. 내 바보 같은 한 마디만 듣고 이곳을 찾아와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다.



난 선택을 해야 했다. 내가 은주를 이곳으로 불렀으니까..

조심스레 뒤돌아 은주를 보았고, 은주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 엉망인 얼굴을 들어 날 바라봤다.



“철민 씨...”

“정말 와줬구나.. 이곳으로..”

“바보..내가 어떻게 여길 잊어..정말 못 찾아올 거라 생각한 거야?”

“어..그랬나봐..”

“하아...그 정도로 나에게 실망한 거야..내가 이곳을 기억 못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건 잘 모르겠어...”

“그 날..정말...”

“아니..그 이야긴 듣고 싶지 않아. 아니 솔직히. 하아...

지금은 잘 모르겠어. 정말 그 날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젠 널 믿을 수 있을까라는 바보 같은 생각도 들고...”

“지...지금 날 이제 못 믿겠다는 얘기야...?”

“어...그게...하아....한 번 깨진 신뢰가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넌 믿어?”

“........”



은주는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절망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미안..내가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인가 봐. 근데 진짜 지금은 솔직히..”

“아니...내가 많이 상처 줬구나. 그래서 이렇게 힘들었구나 싶어. 며칠 못 본 사이 얼굴이 많이 야윈 거 같아..”

“아니야...네가 더 그런 걸...”

“나야...나 같은 년은....괜찮아...근데 맘이 너무 아프다...나와의 믿음이 깨져버렸다는 그 말이..그게 너무 아파..”

“은주야.....”

“믿게 해줄게...”

“어....?”

“믿게 해주겠다고...”



은주는 그 말과 함께 이제 완전히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오고 있는 밤바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지금 뭐하는.....’



조금의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당장 나오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조금도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은주는 벌써 허리까지 물이 차 있는 곳으로 들어가면서도 조금도 멈추지 않았고, 동해의 바다라면 금방 머리까지 물이 차오를 것이다.

말려야했다. 당장 뛰어가서 은주를 데리고 나와야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정말 완전히 얼어버린 것처럼 몸은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았고, 애타는 내 외침은 입 안에서만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어깨까지 물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곳까지 들어가 있던 은주는 뒤돌아보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세상 누구보다 예쁜 미소를 지으며...

이윽고 완전히 은주의 얼굴이 바다 속으로 잠기고 완전히 얼어있던 내 몸은 거짓말처럼 풀렸다.



“안 돼....안 돼...안 돼!!!!!”



꿈이 아니었구나, 꿈이 아니었어.

꿈에서 본 그 모습이..꿈이 아니었어. 아직은 안 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



난 정말 미친놈처럼 바닷가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었다.

지금은 내가 수영을 못 한다는 것도,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은주를 살려야겠다는 생각 하나뿐..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이미 어두워진 밤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뛰어들었고, 내 손은 미친 듯이 은주를 찾아 헤맸다. 제발 내 손에 은주가 닿기를.. 제발..

간절한 내 기도 통했을까,

손에 무언가 잡히는 느낌과 함께 난 그걸 밖으로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내 의식은 점점 흐려져 가고 있었다.



역시 수영도 못 하는 놈이 바다에 뛰어드는 것은 무리였을까,

이렇게 같이 은주와 함께 떠나가는 것인가..

뭐 은주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과 함께 점점 흐려지던 내 의식은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흐릿하던 앞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는 어디인 것일까..

천국인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천국에 갈 운명은 못 될 거 같은데, 그럼 지옥인가 보다.

그런데 어째 지옥치고는 주위가 너무 새하얗다. 내가 그동안 지옥은 음침할 거란 생각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지옥이랑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다.

그리고 주위에 무언가 돌아다니는 듯한 저건 뭐지.. 귀신인가, 아님 저승사자인가..

별의 별 생각을 하며 점점 정신도 맑아지며 주위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직 죽진 않은 것인가...’



무언가 안도감이 밀려온다. 역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던가..

아직 살아있다는 생각에 기뻐하기도 잠시, 은주가 떠올랐다.



“은주..!”

“아직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아..네...너...!”



의사인 줄 알고 무심결에 대답하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난 또다시 주먹이 나가려는 걸 겨우겨우 참아야만 했다.



“화가 나는 건 이해하지만 옆에 은주 씨도 있으니 일단 좀 안정을 취하시고..”



남자의 옆에 은주가 있다는 말에 난 안정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남자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고 옆 침대에 누워 있는 은주에게 다가갔다.

은주는 세상모르고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고 그런 은주를 보자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응급조치는 잘 끝나고 몸에 이상도 없는데 아직 깨어나진 않으시네요..”

“그게 무슨...?”

“뭐..푸욱 잘 수도 있긴 한데 너무 오래 못 깨어나고 있어서 의사가 조금 걱정을 하더라구요”

“얼마나..얼마나 지났는데...?”

“지금 한..18시간 정도...”

“18시간...?”



18시간동안 수면이라니..수면시간 치곤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다.

난 다시 불안감이 밀려왔고, 은주가 혹시라도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왔다.

왜 그랬을까..완전히 바다에 다 들어가기 전 은주를 붙잡았어야 했는데 왜 바보같이 보고만 있었을까..



뒤늦게 엄청난 후회와 자괴감이 밀려왔지만 이미 너무 늦은 일이었다.

이미 은주가 깨어나는 일은 내 손을 벗어난 일이었고, 난 그저 은주가 깨어나길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 할 주제는 안 되지만 은주씨도 안정을 취해야 더 빨리 깨어나겠죠. 완전히 회복되고 더 때려도 좋으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



남자는 뭔가 해탈을 한 듯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고, 남자의 말처럼 완전히 회복한 뒤에 때려도 될 일이고

지금 은주의 옆에서 내가 울고 난리를 친다면 안정을 취하는데 분명 좋지는 않을 거 같아 남자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우선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은 꼭 드리고 싶네요. 제가 이렇게 모든 걸 만들어 버린 거니까..”

“죄송한 건 알아? 아는 인간이...하아...”

“네..죄송합니다”



남자는 거듭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남자의 이름은 민수, 민수는 은주의 회사에 같은 팀에 막내로 들어온지 1년이 조금 안 되는 직원이었다.

민수는 처음 은주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하는데 자신의 첫사랑과 너무나 닮은 은주의 모습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 예전 첫사랑의 사진을 보여주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모는 은주와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사진에서 느끼는 그 분위기가 묘하게 민수의 첫사랑은 은주와 닮아 있었다.



당연히 처음부터 은주가 유부녀란 사실을 알아서 멀리하려고 하고,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디 그렇게 쉬운 것인가..

그런 민수의 밀어내려는 생각과 달리 민수는 점점 은주에게 끌려갔고,

처음엔 일적인 대화 외에 한 마디도 섞지 않았는데 어느새 회사에서 같이 장난도 치고 사적인 대화도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은주는 철저하게 민수를 회사사람 혹은 귀여운 동생 정도로 대했고,

그럴수록 점점 커져가는 자신의 마음으로 민수는 몹시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쯤 은주의 위에 있던 대리가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되어 단체 회식을 했고,

모두 가고 은주와 둘만 남아 2차를 가서 민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마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은주는 여전히 귀여운 동생 취급을 하며 민수를 밀어냈고,

민수는 또 한 번 확인사살을 당했지만 그 맘을 접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은주에게 이벤트를 해주려고 회사 앞을 찾아갔던 날,

은주는 확실히 나에 대한 서운함으로 부쩍 민수와 가볍게 차나 술을 마시는 횟수가 많아졌고

그 날도 같이 거래처에 갔다 오는 길에 나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민수는 그게 자신에게 끌릴 수 있는 일종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그 날 기습적으로 은주에게 키스를 한 것이었다.

당연히 동생 이상으로 보지 않던 은주에게 뺨을 얻어맞은 것이고...



그 후 민수와 은주의 관계는 조금 서먹해졌다고 하는데 한 달 만에 그것도 퇴근을 한 후 은주가 연락을 먼저 해 온 것이다.

바로 그 날, 내가 올 수 없었던 그 날..

은주는 그 날 정말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고, 겨우겨우 집주소와 비밀번호를 물어봐서 민수는 은주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고 했다.



“그래서...”

“저도 남잡니다. 그래서 나중에 때리셔도 좋다고 말한 거구요”



민수의 말에 내 손엔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주먹을 쥐고 있었지만 일단 난 민수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때리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



“은주씨는 정말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정말...솔직히 은주씨를 어떻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은주씨는 완전히 취해있었으니까요. 내가 손을 댄다고 해도 전혀 기억을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

“그리고 결국 전 쓰레기같이 실행에 옮겼습니다. 잠든 은주씨의 모습은 정말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웠고, 전 살며시 은주씨의 입술에 입을 맞췄죠...”

“후우...그래서...”

“아..그리고 일단 은주씨가 옷에 너무 심하게 토해서 옷을 모두 벗겨야 했어요. 토한 옷을 입고 자게 할 순 없었으니까요..”

“간단히 샤워도 시키고...?”

“네...”

“하아..믿기 힘든 얘기로군..샤워만 시켰다?”

“네..믿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죠..”

“그래서..”

“정말 샤워 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후 침대에 눕히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예쁜 은주씨를 보고 도저히 참기가 힘들었고,

은주씨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조심스레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가슴을 만졌습니다”

“하아..도저히 듣고 있기가 힘들군....”



난 정말 당장이라도 민수의 얼굴에 내 주먹을 꽂고 싶었다. 도대체 지금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무슨 말을 하고픈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들어주십시오. 그 후엔 어떻게 해도 좋습니다...”

“후우.....”



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은주씨의 잠옷을 벗겨서 완전히 알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샤워를 하면서도 느꼈지만 은주씨의 벗은 몸은 눈부시게 아름다워 너무나 가지고 싶더군요...”

“.......”

“사랑스러운 은주씨의 벗은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입술에 키스를 다시 하려는데 은주씨가 잠결에 이름을 부르더군요...”

“....?”

“당신의 이름을..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네..제가 하려고 했던 건 강간이었습니다. 미친놈이죠.

사랑하는 여자를 강간하는 쓰레기 같은 놈이 세상이 어디에 있을까요..전 욕정에 눈이 멀어 미친 짓을 하려고 했던 겁니다”

“하아....”

“그제야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고, 난 다시 은주씨에게 잠옷을 입혀주고 욕실에 들어가 숨죽여 울었습니다.

내가 너무나 비참해서..내 모습이 너무도 쓰레기 같아서..”

“그런데....”

“네..”

“그런데 왜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거지? 은주도 어차피 기억 못하는 일인데, 평생 당신 혼자서 묻어둬도 될 일이잖아”

“제가...제가 너무 큰 잘못을 했으니까요..말해버렸으니까요..그래선 안 됐는데..”

“무슨...”

“제가..제가 은주씨에게......”



민수는 쓰러질 듯이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고, 난 그제야 민수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민수가 혼자 벌인 일을 은주에게 털어놓았던 것이고,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은주가 강릉으로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믿음이 깨져버렸다는 내 말에 모든 걸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바닷가로 뛰어든 것이었다. 바보같이..



“죄송합니다...죄송해요...나란 쓰레기 같은 놈 때문에..평생 벌을 받겠습니다...평생...

당신에게 이제 모든 걸 털어놨으니 이제 어떻게 절 해도 상관없습니다. 마음대로...”



민수는 정신 나간 놈처럼 흐느끼며 말을 이어갔고, 난 민수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반성은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하죠. 어쨌든 이야기해줘서 고맙네요. 다만 지금은 병실에서 떠나줘요. 나 혼자 은주의 곁에 있고 싶으니...”

“네......”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처량한 뒷모습으로 걸어 나갔고,

난 멀어지는 민수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은주의 모습..

눈물이 흘러내린다. 왜 난 은주를 믿지 않았을까.. 조금도 은주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을까..

그때 아파트 현관 입구에서 울면서 날 붙잡던 은주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텐데..



“은주야..눈만 떠..평생 내가 벌 받으면서..마음의 빚 갚으면서 살게..그러니 제발....”



뿌옇게 흐려지는 눈앞.. 눈물 때문에 예쁜 은주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더 자세히, 더 또렷이 보고 싶은데..



“자기..자기야...?”

“은..은주야...! 은주야..!”



앞은 잘 보이지 않는데 귀는 또렷이 잘 들렸다. 틀림없는 은주의 목소리였다.

눈물을 훔치고 은주를 바라보자 날 향해 너무나 예쁜 미소로 은주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기 맞구나...”

“은주야...미안해..내가..내가..다...미안..”

“괜찮아...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사랑하는 사이에 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다고...”

“고마워..고마워...내가 평생 잘 할게..내가..”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어.. 돌아 와줘서 고마워...”

“사랑해...사랑해...정말...사랑해..”

“으응...나두.....하아암~ 나 근데 잠 와..더 자도 될까..?”

“그래..자아..내가 옆에서 지키고 있을게...”

“이제..나 안 떠날 거지...?”

“그럼...절대 절대 안 떠나..”

“으응...”



은주는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 다시 잠들고 있었고,

난 다시는 이 손을 놓치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며 은주의 손을 꼭 붙잡고 잠든 은주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은주가 깨어서 봤을 때 날 볼 수 있게.. 그 곳에서 그렇게 은주를 지켜봤다.







*epilogue





한창 바쁜 시간인데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려댄다. 또 누가 이 시간에 전화를..

조금은 짜증이 나 있던 나는 휴대폰에 떠 있는 은주란 이름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안 바빠?”

“좀 바쁜데 괜찮아. 이 시간에 무슨 일?”

“빅뉴스~”

“응?? 무슨?”

“자기 이제 아빠 된다고”

“어...무슨 소리야..아..아빠??”

“어~ 테스트기 해봤는데 두 줄이야~ 혹시 잘못 나왔나 싶어서 또 해봤는데 계속 두 줄이네..헤헤..”

“와아...대박..대박!! 이거 지금 뻥치는 거 아니지??”

“고럼~ 내가 장난을 잘 치지만 설마 이런 걸로...”

“아빠.. 아빠라니..!!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어..모르겠어..아직 얼마 안 된 거 같아. 입덧은 안 하는 걸러 봐선..”

“어..그래..일단 산부인과 가고..어..또 뭐해야 되지..”

“정신 좀 차려~ 내가 알아서 잘 하니까...크크..그냥 일단 이 기분 좋은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야 해서 전화한 거야”

“그래..고마워..완전...사랑해...고마워..!”





10개월 후



은주를 쏙 빼닮은 예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하나만 놓을 거면 무조건 여자, 둘을 놓더라도 첫째는 무조건 여자였으면 하는 우리의 바람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애기는..자?”

“어~ 어머니가 재우시고 잠깐 장 본다고 나가셨어..”

“그래..후아..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집에서 너랑 있는 거 같다”

“그러게..산후조리원 한 달 있었는데 왜 그리 길게 느껴지지..”

“한 달이면 길지 뭐..야..저 밖에 봐라..벌써 가을이네..그렇게 덥더니..”

“으응...올해는 유독 여름이 더워서 그런가 단풍이 예쁘네..”

“그러게....예쁘네...아..우리 애기 이름..”

“응?”

“가을이로 할까? 가을에 태어났으니까..”

“가을이? 흐음..예쁘긴 하네...그럼 둘째는 겨울에 놓고 겨울이라고 지을까?”

“그것도 괜찮네...크크”

“어..왜 웃어..진지하게 괜찮을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냥..좋아서..그래 일단 첫째는 가을이로 하자”

“응 좋아~”



은주는 이름이 몹시 마음에 드는지 내 다리에 누워 밖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고,

난 그런 은주의 머릿결을 넘기며 은주를 향해 같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여름을 닮은 아내.. 사랑스러운 은주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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