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의 그녀 - 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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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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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의 그녀 - 중편

3일간 쉬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쏟아지는 업무들,

마치 내가 출근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팀장은 엄청난 양의 업무를 나에게 떠맡겼다.

슬퍼할 여유, 그런 시간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고작 3일이란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조금은 슬퍼할 시간은.. 조금은 힘들어할 시간을 줘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냉혹한 현실에선 그런 조금의 여유조차 나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있어 아주 조금의 장점 또한 존재했다.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며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힘들고 슬프다는 감정을 잊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이런 것도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한 달, 정확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할아버지가 정말 돌아가신 것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에 치여서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팀장은 이러다간 내가 정말 일하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3일간 연차를 내고 쉬고 오라고 말했다.

당연히 팀장 스타일대로 권유가 아닌 통보였는데, 내가 괜찮다고 말해도 이미 승인 처리가 다 끝났다는 어이없는 말만 돌아왔다.



휴가도 내 맘대로 못 쓰는 회사라니 뭐 이런..

하지만 그런 말을 팀장에게 할 수 있을 리 없었고, 예정에도 없던 3일간의 휴가를 받고 한 달 만에 정시에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집.

원래 혼자서 살아 내가 출근하고 나면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조그만 집이 넓게 느껴지고 텅 비어 보인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일찍 퇴근해도, 3일간의 휴가를 받아도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인생이라니. 우울하다.

독하게 마음먹고 어떻게든 열심히 잘살아 보고 싶었는데, 일 외엔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이런 삶이란 참으로 우울하기 그지없는 것 같다.

뭘 하면서 3일이란 시간을 보내야 하나. 뭘 하면서..

그러다 문득 할아버지 집이 떠올랐다. 정태 할아버지가 그리 처분하라고 했음에도 처분하지 않고 올라왔던 옛날 그 집.

난 무작정 가방 안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짐만을 챙겨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서 고향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4시간이 조금 안 되게 달려 도착한 고향, 이미 버스는 끊긴 지 오래인지라 택시를 타고 난 곧장 집으로 향했다.

텅 빈 집. 이젠 이곳도 텅 비어 있다.

더 이상 나를 반겨줄 할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으니.



방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니 아직 전기가 끊기지 않았는지 환하게 불이 들어온다.

한 달 전 내가 깔끔하게 치우고 갔던 그대로 있는 물건들..

당연히 내가 가고 나서 집에 왔던 사람이 없겠지만 사람의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문득 서글퍼진다.



할아버지는 나 외엔 기다릴 사람이 없었던 사실이..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눈물이 다시 흐르려는 걸 심호흡을 두세 번 하면서 억지로 참았다.

그냥 그냥 울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 집에 와서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보란 듯이 나 이렇게 잘살고 있다고. 할아버지 손주가 이렇게 잘 자라서 멋지게 잘살고 있다고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예쁜 색시랑 결혼도 하고. 나 닮은 증손주도 할아버지에게 꼭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허망하게 갑자기 가실 줄이야.



“후우......”



담배가 당긴다...

주머니를 뒤적이니 한 달 전 사서 한 대 피웠던 담배와 라이터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난 천천히 걸어 나가 바다로 향했다.

집 앞 조용한 밤바다로….



여름이긴 하지만 피서지가 아니라 고기를 잡는 걸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만 있는 조그맣고 조용한 동네다 보니 이 시간에 바다는 조용하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밤바다. 난 그곳을 걸으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이 들이마셨다 뿌연 연기를 한 번에 내뿜었다.



기분 좋은 느낌. 연기와 함께 내 안에 있던 응어리도 한 번에 다 날아가는 듯하다.

내 착각이겠지만. 그 잠깐의 순간엔 뭔가 마음속이 후련해지는 듯한 그런 기분이 느껴졌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 해변에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무언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낀다.



어릴 때도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으면, 학교에서 누군가 싸우거나 선생님에게 혼나고 나면 난 나 혼자 집 앞에 바다를 한참 동안 걷고는 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걷다 보면 무언가 막혀있던 응어리가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기분이 좋았다.

이젠 희미하게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어린 시절의 기억. 그 잊고 싶은 기억 속에서

그나마 기분 좋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기억이 바닷가를 산책하던 기억이었다.



얼마나 한참을 걸었을까. 슬슬 숨이 차온다. 연거푸 담배를 몇 개비나 피우면서 걸었던 것 때문인지,

단순 운동 부족으로 인한 체력이 저질이 돼버린 탓인지.

어쨌든 숨이 턱 끝까지 차서 더 이상 걷기가 힘들다.

난 그대로 가던 길을 멈추고 해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야..별 많네..많다 많아...”



눈앞에 보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 이렇게 많은 별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서울 하늘에서 별을 보기란 비가 온 후 날씨가 정말 좋은 날이 아니면 힘든 일이니..



“좋네 좋아. 먹고 살 것만 있으면 내려와서 사는 것도 어쩌면 나쁘지 않겠네.”



돈, 결국 돈이 문제다. 하늘에 떠 있는 예쁜 별들, 너무나 평온한 밤바다의 풍경..

이런 것들이 지금은 너무나 좋지만 당장 내려와서 먹고살 게 없다면 결국 이런 것들도 다 무의미해질 테니까.



“하......”



씁쓸하다. 이런 좋은 풍경을 감상하면서 겨우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내가 한심하고.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나 씁쓸했다.



“가자. 집으로..”



난 옷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걸어가다 근처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횟집에서 소주 한 병과 간단한 안줏거리를 사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동이 틀 때까지 혼자서 술을 마시며 청승을 떨었다. 이 시간에 이곳에서 나와 술을 마셔줄 사람은 없으니.



환하게 밝아오는 아침..

거의 밤을 꼴딱 새워서 그런 것인지, 술기운이 슬슬 올라와서 그런 것인지 난 밝아오는 아침을 보며 그대로 필름이 끊어지며 잠들어 버렸다.



“민수야, 민수야, 야야 좀 일어나 보아라.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아나?”

“흐으음....으으음..”

“민수야~ 민수야! 이놈아..!”

“어으음...정태 할아버지?”

“그래~ 이제 정신 좀 드나?”



이미 점심시간도 한참 지났는지 창호지 문에 비춰 눈부시게 들어오는 햇살에 난 절로 눈이 찌푸려졌고, 내 앞엔 정태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가 근데 어쩐 일로...?”

“내 청소 하려고 왔다가 네 자고 있길래 깨웠지!”

“청소요?”

“그래, 청소. 네가 집 못 판다고 했는데 그냥 두면 유령 집 같이 될 거 아니냐. 누가 그래도 한 번씩 청소도 해주고 해야 좀 집이 사람 사는 집 안 같겠나.

너도 한 번씩 내려올 거 같기도 하고.”



청소. 아무리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집이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집이 너무나 깨끗했다.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있다고 생각되기엔.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난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정태 할아버지에게 넙죽 절을 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내 혈육은 없지만. 이렇게 나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웠다.



“이제 정신 좀 들었으면 나가서 밥이나 좀 챙겨 먹자. 시간이 벌써 4시가 넘었다”

“네...”



아직 비몽사몽에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난 정태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러 나와 근처의 백반집에서 간단히 아침 겸 점심 식사를 때웠다.



“맛은 좀 있나?”

“네 괜찮아요”

“근데 어쩐 일이고? 휴가가?”

“네. 3일 쉬게 돼서. 어제 내려왔는데 내일쯤 올라가야죠”

“그래. 미리 말했으면 내가 맛있는 거라도 좀 사주고 그랬을 건데..”

“아니에요. 이 정도면 훌륭하죠.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에이. 뭘 이런 거 두고 신경은. 내일 올라간다고?”

“네..”

“그럼 오늘 저녁에 간단하게 술이나 한잔하자. 할아버지가 사줄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아니요. 술은 제가 대접해드려야죠”

“됐다 그만. 다음에 대접하고. 오늘은 내가 한 잔 살 테니까.”

“네..”

“다 묵었나? 그럼 저녁에 찾아갈 테니까 좀 푹 쉬고 있어라. 술은 그라고 혼자 마시는 게 아니다. 먹고 싶으면 다른 사람이랑 같이 먹고.”



정태 할아버지는 그렇게 고집을 피우고 자기 할 만만 다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가셨고, 난 그릇에 남아있는 밥을 마저 다 해치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뭐하지...”



멍하니 방에 앉아 있다 쌓여있는 유품 중에서 앨범처럼 보이는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난 그 책을 꺼내서 첫 장을 폈다.

한눈에 봐도 할아버지란 걸 알 수 있는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 모습..

항상 내 기억 속엔 흰 머리가 소복한 영락없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는데 이렇게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보니 무언가 낯설다.



“내가 할아버지랑 많이 닮았구나.”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인가.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모습은 지금의 나와 많이 닮아 있었다.



“신기하네...”



내 입가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고,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져 온다.

그리고 수도 없이 많은 내가 찍혀 있는 사진들. 지금은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아 휴대폰에도 내 사진이 거의 없는데

어릴 때 왜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었을까 싶어질 정도로 사진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사진 찍는 걸 참 좋아하셨으니..



어느새 마지막 장, 그곳엔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고등학교 졸업식 날 할아버지와 함께 찍었던 사진이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할아버지와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

참았던 눈물이 나도 모르게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린다.

할아버지가 몸서리치게 보고 싶어진다. 이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 속 깊이 사무친다.



“후우...후우...”



호흡이 가빠지고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뚝뚝 떨어진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할아버지.....”



울었다. 한참을. 좀처럼 울어도 속은 시원해지지 않았고..

더 이상 지쳐서 눈물이 나오지 않을 정도가 돼서 눈물은 멎었고, 난 멍하니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한참을..

서서히 지기 시작하는 해. 해가 지면서 밖이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불이 켜져 있지 않은 방 안도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곧 있으면 저녁이 다가오나 보다.

정태 할아버지와의 약속이 생각난다. 그런데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아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한참을 계속 그냥 누워 있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느새 밖은 완전히 깜깜해졌고, 멀리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난 정태 할아버지의 발걸음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정태 할아버지가 들어오더니 바닥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긴 눈물 자국이 그대로 묻어 정신 나간 놈처럼 바닥에 누워 있을 텐데. 안 놀란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앨범 보고 청승 떨고 울었나? 사내 자식이..일어나거라. 술이나 한잔 하러 가자”



정태 할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아 일으켰고, 난 엉망진창인 몰골로 따라 나가 어느새 횟집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자. 받아라..”



난 말없이 술잔에 따라주는 술을 받아 그대로 원 샷으로 들이켰다.



“뭐 그리 급하게 마시노. 천천히 묵지. 안주도 묵고”

“네...”

“힘들면 힘들어하고, 울고 싶으면 울고. 그러는 게 낫다. 괜히 참다가 병난다는 말이지. 근데. 그래도 건강은 좀 생각하면서 힘들어해야 안 되겠냐?

그렇게 혼자 술 먹고 찬 방바닥에서 울고 하면 건강 해친다...”

“네...”

“자 한 잔 더 받아라.”



난 묵묵히 정태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다시 원 샷을 하고 회 몇 점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래. 안주는 먹어야 탈이 안 나지. 민수야..”

“네. 할아버지..”

“이거 받아라..”

“이게 뭔가요...?”

“받아보면 안다.”



정태 할아버지는 말없이 손에 들린 통장을 나에게 내밀었다. 할아버지 이름인 김동민이 적혀있는 통장을..

그 통장엔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매달 할아버지에게 보내드렸던 용돈 20만 원이 조금도 쓰이지 않고 그대로 저금 되어 있었다.

1,100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

통장을 잡고 있던 손이 떨리며 그렇게 쏟아내서 조금도 나올 거 같지 않았던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내가 그렇게 손주 놈이 보내주는 돈으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하라 해도. 안 쓰대. 너희 할아버지는. 손주가 주는 돈 아까워서 어떻게 쓰냐고..”

“.......”

“네가 매달 보내주는 돈 하나도 안 쓰고 고대로 모아둔 거다. 죽기 전에 느낌이 싸했는지. 며칠 전에 나한테 민수 오면 주라고 전해 주대.

그리고 며칠 있다 그렇게 된 거다. 난 우스갯소리로 죽을 때가 다 됐나. 돈 든 통장을 나한테 주고. 내가 도망가면 어쩌려고 했는데.

진짜 그리될 줄 누가 알았겠나.”



정태 할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잔에 든 소주를 원 샷을 하고는 쓴 입맛을 다셨다.



“그리 갈 줄 알았으면..에이...고생만 하다가..”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저 눈물만이 흘러내린다.



“오늘까지 울고. 오늘까지 힘들어하고 기운 내라…. 그래서는 네 할아버지가 좋다고 하겠나. 힘들어도 웃고 해야 좋아하지...”

“네에....”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고는 잔에 담긴 소주를 원 샷하고는 난 주먹을 굳게 쥐었다.



힘을 내자. 정태 할아버지 말대로..

이런 나약해 빠진 모습을 할아버지는 원하지 않으셨으니까, 할아버지는 언제나 조용하고 소극적이던 내가 남자답길 원했다. 남자다운 그런 모습.

오늘까지만 울고 오늘까지만 힘들어하고.. 힘을 내자..



“한 잔 더 받아라”

“네”



난 잔에 담긴 소주를 받아 다시 원 샷을 하고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정태 할아버지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웃어라. 웃어야 좋을 일이 오지...”

“네. 할아버지도 한 잔 받으세요”

“오냐. 따라 보아라.”



정태 할아버지와 난 그날 가게 문이 닫을 때까지 밤이 지나고 새벽이 하얗게 밝아올 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오랜 시간동안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한 번씩 놀러오고”

“네. 할아버지, 다음에 올 때는 꼭 연락드릴게요”

“그래..”



3일간의 짧지만 길게 느껴졌던 시간이 지나고 난 다시 서울에 올라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그게 두렵거나 힘들게 느껴지진 않는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다고 하던가..

고향에 내려오면서 너무나 무기력하고 슬펐던 상황에서 난 새롭게 희망을 찾고 있었다.

살고자 하는. 살아야 할 희망의 빛을...



4시간이 조금 안 되어 도착한 서울,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추고 있다.



‘자.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서울에 와서 첫발을 내디딘 그날처럼..’



집 문을 열고 들어와 간단히 짐 정리를 하고 샤워를 하며 머리를 보는데 너무 덥수룩하다.

원래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는 편이라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잘라줘야 하는데 생각해보니 머리카락을 자른 지 한 달이 조금 지나 있었다.



“머리를 좀 잘라야겠네..”



난 샤워를 마치고 간단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늘 가는 단골 미용실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오늘이 평일이라 그 아가씨가 없을 거란 생각에 아쉬움이 든다.



‘주말만 일한다고 했던가...’



어느새 미용실 앞에 도착한 나는 들어가기 전 살짝 안을 살폈다. 원장이 머리를 하고 있었고, 그 아가씨는 보이지 않는다.



‘어떡하지...’



갈등이 생긴다. 평소라면 생각하지도 않고 머리를 했을 텐데.. 분명 마사지는 원장이 더 잘하니 고민할 이유가 없는데 왜 이리 고민이 되는 걸까..

왜 자꾸 머릿속에 그 아가씨가 떠오를까..

결국 미용실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고 고민하던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



‘주말에..주말에 하자..’





다시 시작된 일상. 변함없이 나에겐 일이 산더미 같이 떨어지고, 정신없이 바빴지만 난 어딘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상을 찡그리지 않고 웃는다는 것. 팀장은 처음엔 쉬고 오더니 머리를 다쳐서 이상해졌느냐며 나를 바라봤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내가 실없이 웃고 있자 그래 인상 쓰는 것보단 그게 낫잖냐고 나를 바라보는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긍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복귀하고 며칠이 지나가고 다가온 토요일, 토요일 출근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난 아침 일찍 출근해 서둘러 일을 마치고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퇴근해 집 근처의 단골 미용실로 향했다.

두근대는 마음. 머리 정리하러 가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그 아가씨가 있겠지...’



난 그날처럼 밖에서 지켜보지 않고 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딸랑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잠시 앉아서 쉬고 있던 아가씨가 날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전에 오셨던 그 분이죠?”

“네. 기억하시네요”

“그럼요~ 단골손님은 기억해야죠”



여전히 싱그럽고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는 그녀..



“오늘도 머리 정리만 하실 거죠?”

“네..”

“한 달 정도 된 거 같은데 머리가 빨리 자라는 편이신가 봐요. 벌써 좀 덥수룩해졌네요”

“네..그러네요..”



아가씨는 처음 봤을 때와 달리 두 번째 방문이라 내가 조금은 익숙한지 그날보다 훨씬 나에게 많은 말을 걸어왔다.

난 기분 좋게 아가씨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머리 손질을 했고, 다가온 마사지 시간..

뒤로 누워 시원한 마사지를 받자 절로 잠이 솔솔 오기 시작한다.



‘아...기분 좋다..편안해...’



언제 받아도 기분 좋은 두피 마사지..일주일 동안 쌓였던 모든 스트레스와 두통이 다 날아가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다 끝났습니다”

“아..끝났나요?”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전에도 살짝 주무시더니.”

“하하..그랬나요...”



기억이 가물거려서 그때 잤었나 기억도 잘 안 나는데 그날도 잤던 모양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마사지를 받으면서 자다니. 갑자기 무언가 부끄러움이 밀려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무 부끄러워 하지 마세요. 피곤하면 마사지 받고 하면 잠 오죠. 저도 정말 피곤한 날은 마사지 받으러 가서 코 골면서 자고 그래요.

그만큼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죠”

“아..그런가요..하하..”

“그럼요..”



난 아가씨의 말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고, 시끄러운 드라이기 소리와 함께 우리의 시간은 다시 아쉽게 끝나가고 있었다.

이 시간이 끝나갈수록 마음속으로 고민이 피어오른다.

남자친구가 있는지 물어볼까? 커피나 한잔 하자고 말해볼까?



끝없는 고민이 이어지는 사이 어느새 드라이가 끝나고 다 됐다는 말이 이어진다.

난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2장을 내밀었고, 아가씨는 들어가서 거스름돈을 꺼내 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오시고요..”

“저....”

“네??”

“갑자기 이런 말 해서 너무 당황스러우실 텐데. 그냥 할게요.”

“무슨 말이신지...?”

“저. 그쪽 이름도 모르는데 호감이 있어요. 그래서 남자친구가 없다면 혹시. 저와 커피 한 잔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용기일까. 내가 미친 건가.

예전이라면 절대 못 할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너무나 후회될 거란 사실은 분명했고, 혹시나 거절한다 해도 내 선택엔 후회가 없었다.



“흐음.....”



고민의 시간. 역시나 거절인가.

역시 저렇게 어리고 예쁜 아가씨에게 남자 친구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아니.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없다고 하더라도 역시 나 같은 남자는 별로인 거지..



“어. 죄송합니다. 괜히 부담을 드려서. 전 이만 가볼게요.”



예상했던 반전 없는 결과다. 난 체념을 하고 돌아섰고 그 순간 아가씨가 날 부른다.



“저. 잠시만요”

“네?”

“왜 그렇게 포기가 빨라요. 나 아직 대답 안 했잖아요. 그 시간 내드릴게요.”

“네...???”



난 아가씨의 말이 믿을 수 없어 다시 한번 물었다. 정녕 나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인지.



“시간 있다고요. 커피 한잔하자고요.”

“어. 이거 지금 저 놀리시는 거 아니죠? 이거 지금 현실인 거죠...??”



난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내 볼을 꼬집었다. 아프다. 진짜 현실인 건가..!

아가씨는 그런 내 바보 같은 모습을 보며 활짝 웃었고 난 정말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말은 제가 일해서 안 되고. 평일엔 될 거 같아요. 괜찮으신가요?”

“그럼요 괜찮죠. 없던 시간도 내야죠..”

“네..휴대전화 좀 주시겠어요.”



아가씨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고, 휴대폰을 건네주자 전화번호를 찍어 주었다.



“어. 저 이름은...?

“아..어서오세요..!”



그 순간 딸랑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왔고, 단골손님인 듯 보이는 그 손님이 아가씨에게 말을 거는

바람에 난 이름도 들을 새도 없이 어색한 인사와 함께 미용실에서 나와야 했다.



어..뭐라고 저장하지? 미용실의 그녀.  우선 그렇게 이름을 저장했다.



“진짜..진짜 성공한 거지??”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얼떨떨한 기분..그런데 분명 사실이겠지?

아까 꼬집어서 아팠으니 이건 꿈이 아니라 사실일 거야..



내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이 내 마음을 대변해주듯이 내 기분은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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