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겨울의 바다를 닮았다 - 상편
토요일.
청량리역에는 많은 사람이 붐볐다.
역사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윤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윤재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침이 8자 부근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지선과 약속을 한 시간은 아침 7시.
한 시간이 이상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착잡해진 윤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의 절정으로 향하는 12월 중순이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윤재의 입김이 흩뿌려졌다.
윤재는 생각했다.
역시 안 오려는 모양이다.
약속은 아니었다. 사실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별을 고한 여자친구를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아니 붙잡기 위해 마음대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기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윤재는 연락을 해볼까도 싶었지만 금세 마음을 접었다.
그녀가 이별을 말한 후 자신의 모든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잊어야겠지. 이십 대 후반에서 서른두 살이 될 때까지 함께한 여자친구를.
윤재는 그렇게 생각하며 코를 훌쩍였다.
추워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윤재는 코를 훌쩍이며 역사 안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혼자서라도 떠날 요량이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겨울 바다를 보고 오면 좀 괜찮아지리라 생각하며.
*
“정동진역 한 장이요.”
윤재는 정동진행 기차표를 하나 샀다. 그리고는 뒤이어 기차표를 구매하는 여자를 지나쳐 기차를 타러 갔다.
기차는 버스나 지하철과 달리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들뜨거나 설레는 마음이랄까? 하지만 지금의 윤재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조용히 앉아 착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기차가 출발했다.
서울을 벗어나자 겨울의 쓸쓸한 풍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이라도 쌓였으면 눈부신 설경이 장관이었겠지만, 지금은 바싹 말라 얼어붙은 논밭과 앙상한 나무들이 을씨년스러웠다.
기차가 출발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윤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 말이다.
하지만 정동진까지는 거의 6시간을 가야 했다. 아무리 울적한 기분의 윤재라도 6시간 동안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윤재는 기차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주전부리가 담긴 카트가 다니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카페 칸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이 두 명을 데리고 앉아 있는 부부와 맥주를 마시고 있는 아저씨 한 명이 다였다.
아저씨는 맥주에 오징어를 먹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기차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는 술을 좋아하는 윤재에겐 굉장한 유혹이었다.
윤재가 직원에게 다가갔다.
“맥주 하나랑 오징어 하나 주세요.”
결국 윤재도 맥주와 오징어를 구입해서 남아 있는 자리에 앉았다.
맥주 캔을 따자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윤재는 이 소리를 언제 들어도 짜릿했다.
소리뿐이랴. 맥주를 한 모금 크게 넘기고 오징어를 씹을 때의 그 쾌감! 윤재는 이별에 대한 아픔도 잠시 잊고 맥주 맛에 취했다.
그때 카페 칸에 들어온 여자 한 명이 직원에게 가서 맥주를 구입했다.
“맥주 하나요.”
맥주를 달라는 이야기에 윤재의 고개가 자기도 모르게 돌아갔다.
씹을 거리도 없이 맥주만 구입한 여자는 남아 있는 자리에 가서 창밖을 바라보며 맥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윤재는 그런 여자의 분위기가 꽤 근사하다고 느꼈다.
게다가 평소였으면 흘깃거릴 정도의 미모였지만 이별의 아픔이 남아 있는 그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윤재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맥주 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맥주는 어느새 다 떨어져 있었다.
오징어도 약간 남아 있고 해서 윤재는 맥주를 한 캔 더 사기로 했다.
“저기 맥주 하나만 더 주세요.”
윤재는 다시 맥주를 사가 지고 와 홀짝이기 시작했다.
*
윤재는 맥주도 마셨다.
의자에 앉아 깊은 잠도 잤다.
핸드폰도 만지작거렸다.
하염없이 풍경도 바라봤다.
윤재가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후에야 기차는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6시간은 꽤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정동진역에 내린 윤재는 눈앞에 겨울 바다가 펼쳐지자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흔히 정동진역을 바다에 가장 가까운 역이라고 말한다.
그 표현 그대로 정동진역과 바다 사이에는 넓지 않은 모래 해변만이 위치했다.
윤재는 해변에 가보기로 했다. 토요일이었지만 그리 맑은 날씨도 아니었고 바람도 꽤 많이 불었다.
그런 날씨 탓일까? 역에서부터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으면 특정 인물이 눈에 쉽게 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여자가 윤재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갈색의 롱코트를 입고 자주색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아 반쯤 가린 상태였다.
하지만 윤재는 목도리 위로 드러난 그녀의 눈매만으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기차 카페에서 홀로 맥주를 마시던 여자였다.
윤재는 혼자서 역사를 빠져나가는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혼자 여행 온 건가? 멋있네.’
기차 카페에서도 그랬고, 홀로 걷고 있는 그녀의 지금 모습에서도 분명 어떤 고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윤재는 그녀의 그런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호감이 간다는 표현이 옳았다.
하지만 윤재는 금세 고개를 흔들어 그런 잡념을 떨쳐버렸다.
남자란 얼마나 간사한 생물인가.
연인과 헤어져 죽을 만큼 힘들어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눈이 돌아가는 게 남자란 생물이다.
윤재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런 생물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만 풀릴 리 없다.
역사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윤재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해변으로 향하는 윤재와 행선지가 같은 모양이었다.
물론 함께 해변으로 향한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녀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이 길은 그저 공통의 목적지로 향하는 경로일 뿐이었다.
어쨌든 윤재는 그녀에게서 최대한 신경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겨울의 해변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시린 옥빛의 겨울 바다.
잿빛 하늘과 어울리게 맞닿아 섬뜩하리만치 고고했고, 마치 흰 눈이라도 흩뿌려놓은 것처럼 부서지는 파도는 경외감을 느낄 정도로 장엄했다.
순간적으로 윤재의 머릿속에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희로애락이란 기본적인 감정이 잠깐이나마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윤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충분한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져 힘들고 괴롭던 마음이 잠시나마 잊혔기 때문이다.
번쩍임과 같았던 순간이 지나고 윤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보러오길 잘했다. 여기라면 그녀를 잊을 수 있을.
찰칵! 찰칵! 찰칵!
해탈과도 같은 경지에 올라 들떠있던 윤재의 생각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메라의 셔터 소리였다.
살짝 못마땅해진 윤재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기차에서 홀로 맥주를 홀짝이고, 해변까지 걸어오며 유독 눈에 띄던 그녀였다.
그녀는 윤재가 쳐다보는 동안에도 분주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여자의 얼굴을 반쯤 감았던 자주색 목도리는 어느새 턱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윤재가 기차에서도 보고, 걸어오면서도 봤던 여자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카메라 뷰파인더에서 가끔 눈을 떼며 모니터를 확인하는 그녀에게서 윤재는 가장 먼저 이렇게 느꼈다.
하얗다.
그녀의 피부는 정말 말 그대로 하얗다. 이것저것 수식어를 더할 것도 없었다. 그냥 하얗다.
새하얀 피부에 빼앗긴 정신이 돌아오자 다음으로는 그녀의 이목구비가 윤재의 눈에 들어왔다.
옆모습인지라 역시 오뚝한 콧날이 제일 먼저 보였고, 그다음은 무심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 마지막은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이었다.
윤재는 그녀를 잠깐 바라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분명 강렬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런 매력, 아니 마력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윤재는 생각했다.
왠지 범접지 못할 그녀 특유의 분위기가 저 겨울 바다를 닮았다고.
특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저 무심한 눈빛이.
“응?”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 냈다.
어느샌가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자신도 얼결에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을 깨달은 윤재는 무안한 마음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은 한 동안 계속되었다.
윤재는 바다에 최대한 신경을 집중한 채 그녀를 무시하며 민망한 상황을 견뎌냈다.
잠시 후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다시 들리고 나서야 윤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랐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힘들어서 겨울 바다를 보러 온 건데, 그 와중에도 다른 여자에게 눈길이 쏠린 자신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난 다를 줄 알았는데 여느 남자들과 똑같은 새끼구나.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네. 이렇게 잊을 수 있으니.’
“저기요.”
다시 감상에 젖으며 열반의 경지에 들려는 윤재가 또 방해받았다.
이번엔 카메라 셔터 소리도 아닌 여자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소리가 난 쪽은 바로 옆쪽이었다.
겨울 바다를 카메라에 담던 그녀에게서 말이다.
왜 쳐다봤냐고 자신을 질책이라도 하려는 걸까?
윤재는 쓸데없는 걱정에 최대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윤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 압도당한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요.?”
윤재의 어리숙한 되물음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상대의 의사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윤재가 얼결에 카메라를 받아서 들자 여자는 몇 걸음 물러나 바다를 등지고 섰다. 찍어 달라는 의미였다.
윤재는 카메라와 여자를 번갈아 보며 이 상황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사진 촬영 부탁은 여행지에서 흔한 일이라 생각은 길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뷰파인더 안에 여자의 모습을 담았다.
‘진짜 예쁘게 생겼구나.’
겨울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여자의 모습에 윤재는 새삼 느꼈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고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는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여자의 사진을 한 장 찍은 윤재는 카메라를 건네주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여자는 카메라를 받기는커녕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뭐예요?”
“예? 카메라 돌려드리는 건데.”
여자는 잠시 어이없다는 눈길로 윤재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니. 겨우 한 장 찍은 거예요? 이리저리 여러 장 좀 찍어주세요.”
“아. 네.”
윤재와 여자의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윤재는 여자를 카메라 뷰파인더에 재차 담으며 투덜거렸다.
“아니. 내가 자기 사진기사야 뭐야.”
물론 여자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 크기는 아니었다.
여자는 바다를 바라보거나 하늘을 바라보는 등의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투덜거리던 윤재도 매력적인 여자의 모습에 넋을 잃고 셔터를 눌러댔다.
잠시 후 꽤 여러 장의 사진이 찍히고 윤재는 카메라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여자는 카메라를 받아서 들고 찍힌 사진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윤재는 그런 그녀의 앞에 서 있기도 뭐해서 슬쩍 고개를 까딱이곤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윤재의 뒤에서 또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윤재가 돌아보자 여자가 다가와 카메라를 보여준다.
“아니. 사진이 이게 뭐예요. 전 작게 찍고 배경만 잔뜩 찍어놨네.”
“예? 아. 제가 사진 찍는 스타일이 원래 그래서.”
“아니. 그쪽이 뭐 프로 사진작가예요? 무슨 본인 스타일을 따져요. 저를 찍어달라고요. 저를.”
여자가 카메라를 윤재에게 들이밀었다. 다시 찍어 달라는 의미였다.
윤재는 뭐라고 따지지도 못한 채 다시 카메라를 받아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번엔 그녀의 요구대로 상반신 위주의 구도였다.
그 와중에도 윤재는 무언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다 뷰파인더 안에 담긴 그녀의 모습에 그 이질적인 느낌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보기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녀의 외모는 분명 세상 모든 일에 초연할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아까부터 느낀 그녀의 말투나 성격은 분명 그런 외모와는 정반대였다.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청아한 목소리로 우아한 말들이 흘러나오기는커녕 드세고 급한 성격의 괄괄한 말들만 쏟아지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에 잠겨 윤재는 한동안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그저 뷰파인더에 눈을 바짝 대고 여자의 외모와 상반되는 성격에 정신을 빼앗겼다.
윤재의 움직임이 없자 여자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뭐해요?”
하지만 윤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여전히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카메라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런 윤재의 자세는 꽤 웃겼다.
허리부터 목까지 구부정한 자세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자세를 보면 누구든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에 살짝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웃음은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는 윤재의 눈에 확실하게 들어왔다.
“아.”
나지막한 감탄이 윤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윤재의 손가락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움직인 손가락이었다.
윤재는 카메라에서 얼굴을 떼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이었다.
굉장히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사람을 홀릴 정도의.
그리고 그 사람이란 부류엔 당연히 윤재도 포함되었다.
여자에게서 웃음이 사라지자 윤재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그 모습이 카메라에 저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재빨리 카메라를 조작해 사진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내 희고 가느다란 손이 윤재의 시야에 들어오며 카메라를 낚아채 갔다.
윤재가 고개를 들자 카메라를 든 여자가 쏘아붙였다.
“남의 카메라를 왜 뒤져요?”
“예? 예? 아, 아니. 죄, 죄송해요.”
여자는 윤재를 한 번 노려보고는 카메라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 사진들을 확인했다.
아까는 이런 상황에서 떠났을 윤재였지만 지금은 쭈뼛거리며 자리를 지켰다.
왠지 그녀가 다시 찍어 달라고 하면 그래야 할 거 같은 어떤 책임감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분위기였다. 사진을 본 여자의 반응이 꽤 괜찮았다.
“이 봐요.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네. 이게 사진이지 괜히 어설픈 예술작품 흉내 내지 말아요.”
말하는 여자의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히 윤재에게 하는 말이었다.
윤재는 그녀가 쳐다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여자에게서 몸을 돌리며 윤재는 생각했다.
‘이제 저 여자한테 방해받지 말고 겨울 바다를 감상하자. 그리고 겨울 바다를 안주 삼아 회에 소주나 한잔하며 지선이나 잊자.’
발걸음을 옮기는 윤재의 마음이 다시 촉촉하게 감상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자가 그런 윤재의 감성을 부숴버렸다.
“저기요!”
내적 여행을 떠나려고 할 때마다 번번이 여자에게 방해를 받은 윤재였다. 그녀를 돌아보는 표정이 고울 리 없었다.
윤재는 잔뜩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또 왜요.”
어느새 카메라를 가방에 넣은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윤재에게 다가왔다.
“겨울 바다 보러 혼자 오신 거예요?”
“네.”
“저도 혼자 왔는데.”
여자의 말에 윤재는 무심코 안다고 대답할 뻔했다.
그녀가 혼자인 것을 오늘 여러 번 봤으니까.
마음에 있던 말을 겨우 삼킨 윤재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근데요?”
“아니. 사진 찍어준 것도 고맙고, 또 제가 너무 무례했던 거 같아서. 어때요?”
“뭐가요?”
“회에 소주 한 잔 안 하실래요? 제가 살게요.”
윤재는 잠시 멍하니 여자를 바라봤다.
이 세상 혼자 살 거 같은 분위기를 가진 여자가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 거지.
여행지에서 여자가 남자한테 소주 한잔하자고 하는 일이 요새는 유행인 건가.
자신이 여행을 안 다닌 사이 이런 풍습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당연히 그런 건 아니리라.
하지만 윤재가 쓰던 시나리오, 또 즐겨보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 분명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윤재의 대답이 없었지만, 여자는 막무가내로 앞장섰다.
“자. 가요.”
여자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윤재는 쉽사리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 여행은 이제는 자신을 떠나버린 여자친구를 잊기 위한 혼자만의 이별 여행이었다.
혼자 바다를 보고, 혼자 소주를 마시며, 혼자 울적한 마음으로 잠들어야 했다.
하지만 막연히 세웠던 그런 계획들이 저 여자에 의해 하나씩 부서지고 있었다.
그때 앞서간 여자의 목소리가 겨울의 파도 소리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아-! 안 오고 뭐 해요!”
겨울의 해변엔 윤재와 그녀 두 사람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많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그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큰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리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윤재는 그제야 여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저 여자 도대체 뭐야!’
끊임없이 그렇게 되뇌며.
*
여자가 윤재를 데리고 간 곳은 바다가 보이는 작은 횟집이었다.
요샌 크고 화려한 건물에 여러 개의 횟집이 들어찬 회센터라고 불리는 곳이 즐비했다.
하지만 용케도 이런 작은, 어떻게 보면 허름하기까지 한 횟집을 여자가 찾았는지 윤재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방바닥에 앉으며 두리번거리는 윤재를 보며 마음이라도 읽었는지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아. 제가 원래 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해서요. 아까 오다가 눈여겨봤죠. 꼭 우리나라 단편영화에 나올 거 같지 않아요?”
“네?”
윤재가 살짝 올라간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언가에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여자가 그 반응을 놓치지 않는다.
“왜요?”
“아뇨. 단편영화라고 해서.”
“아아. 제가 영화 보는 걸 좀 좋아하다 보니 이것저것 많이 보거든요. 그래서 그랬어요.”
“그러시구나.”
윤재가 수긍하고 나자 여자는 우럭회와 소주를 시켰다.
이번에도 윤재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고른 메뉴였다. 하지만 윤재도 가리는 메뉴는 없기에 딱히 상관은 없었다.
잠시 후 회가 나오자 여자는 소주병을 들어 윤재에게 한 잔 따랐다.
윤재는 황급하게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술을 받고는, 여자에게도 술을 따랐다.
두 사람의 잔에 술이 채워지자 여자가 말했다.
“자 건배.”
“아 네.”
윤재와 건배를 한 여자는 거침없이 소주를 원샷했다.
여자는 소주를 마시는 모습조차 매력 있었다. 게다가 대뜸 원샷이라니!
멍하니 보던 윤재는 소주를 마신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얼른 술을 마셨다.
여자는 간장을 살짝 찍은 회 한 점을 입에 넣어 씹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죽인다.”
여자의 입에서 중얼거리듯 나온 말에 윤재는 살짝 헛기침을 했다.
여자의 죽인다는 말은 살아 있는 무언가의 숨을 끊는다는 말은 분명 아니었다.
그녀가 마신 소주가 죽인다는 것일 수도 있고, 입에 들어간 회 한 점의 맛이 죽인다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 바다의 풍경이 죽인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이 합쳐진 뜻이거나 말이다.
어떤 의미이든 그녀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었다. 그래서 윤재도 헛기침을 한 것이다.
근사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겨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윤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근데.”
여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윤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빛에 윤재는 잠시 숨이 막혔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하려던 말을 했다.
“정말 사진 찍어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술 사는 건가요?”
여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윤재를 빤한 눈길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윤재는 적잖이 당황스러웠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뭐 헌팅이라도 했다고 생각해요?”
윤재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당황하는 윤재의 모습이 재미라도 있었는지, 여자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미소는 너무나도 옅어서 윤재가 명확하게 인식하기도 전에 금세 사라졌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 낮술이란 영화가 있거든요. 거기서 남자 주인공이 여행지에서 만난 여자 때문에 한겨울 산에 내버려지는 장면이 나와요.”
여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윤재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런 무서운 일이라도 당할까 봐 그래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신기해서 그랬어요.”
“신기할 일도 많네요.”
여자는 소주병을 들어 혼자 술을 따르려 했다. 윤재가 잽싸게 병을 낚아채 여자의 잔에 술을 채워준다.
여자의 잔에 술을 채운 윤재는 이어서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영화 보는 거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네. 아까도 말했듯이 많이 챙겨보는 편이에요.”
“낮술이란 영화를 얘기하실 정도니까 뭐. 그러실 거 같아요.”
“그 영화 사람들 꽤 많이 봤잖아요?”
“그렇긴 하죠. 워낭소리 때문에 독립영화가 한참 주목받을 때라 시기도 좋았고, 나중에 재밌다고 입소문도 탔었으니까.
그래도 그런 영화는 관심 있는 사람만 보지 잘 챙겨보진 않잖아요.”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윤재는 아차 싶었다. 너무 잘난 체했나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여자의 기분에 거슬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처럼 금세 사라지거나 하는 미소가 아니었다.
여자가 온유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맞아요. 잘 아시네요. 그쪽도 영화 많이 보시나 보다.”
윤재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대답했다.
“네. 저도 좀 보는 편이에요.”
“어떤 장르 좋아하시는데요?”
물어보는 여자의 몸이 처음으로 윤재 쪽으로 기울어졌다.
윤재도 잘 아는 화제가 나와서인지 아까보다 훨씬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장르 거의 가리지 않는 편이에요. 공포영화부터 액션, 로맨스 다 좋아하거든요. 뭐 굳이 하나 꼽기가 힘드네요. 하하.”
.“잡식성이시네. 뭐 저도 그런 편이니까.”
잠시 말이 끊어졌던 여자는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듯 윤재에게 말했다.
“혹시 홍상수 감독 영화도 봐요?”
“그럼요! 당연하죠. 홍상수 감독 영화도 보세요? 아니 그 영화 여자들 별로 안 좋아하는데.”
윤재의 말에 여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편견은 버려요. 홍상수 감독 영화 좋아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가? 하하.”
분위기가 좋아졌다.
많이.
둘이 술잔을 주고받은 뒤 여자가 말했다.
“지금 이 상황 좀 홍상수 감독 영화 같지 않아요?”
여자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윤재가 무릎을 탁! 쳤다.
“아! 맞아요!”
윤재가 동의하자 여자의 목소리가 한층 올라갔다.
“그렇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랑 술을 마신다. 그 감독 영화 주요 내용 중 하나잖아요.
우리 상황도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술을 마시고 있으니 딱 맞네요.”
“하하하-! 신기하네요!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홍상수 감독 영화가 묘하게 리얼하잖아요? 컷바이컷 없이 한 장면이 거의 원테이크로 가면서 배경음악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그리고 영화의 대부분이 술, 섹스, 잡담. 이 세 개로 풀잖아요.”
윤재는 적잖이 당황했다. 여자의 입에서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영화용어들이 쏟아져 나온 건 둘째치고 섹스라는 단어가 거침없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사실 그 세 개가 그 감독 영화를 나타내는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더 리얼한 거예요. 사실 사람 인생이랄 게 뭐가 있어요? 거의 그 세 가지 아니에요?”
여자의 목소리가 꽤 올라갔다.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윤재가 미소 띤 얼굴로 받아주었다.
“저도 그래서 어릴 땐 홍상수 감독 영화가 완전 재미없었어요. 근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남자들의 지질한 모습에 괜히 실실 웃음도 나면서.”
“와-! 그쪽 뭘 좀 아시네요! 얘기가 이렇게 잘 통하는 사람 찾기 힘든데!”
한껏 밝아진 얼굴의 여자가 잔을 들며 말을 이었다.
“자 짠!”
분위기가 좋아지니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횟수도 빈번하게 늘어났다.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와중에 여자가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감독 영화의 두 남녀는 꼭 섹스를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되려나.”
여자의 시선은 윤재에게 향하지도 않았고, 목소리도 작았다. 하지만 바로 앞에 앉아있는 윤재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윤재의 눈이 놀란 토끼 눈이 됐다. 눈을 크게 뜨고 여자를 바라보았지만, 여자는 고개를 돌린 채 윤재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잠시 횟집에 적막이 흘렀다. 윤재와 여자를 제외한 손님도 없기에 더욱 조용했다.
멀리서 겨울 바다의 성난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정도였다.
묘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윤재는 재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오, 오늘 눈이 왔으면 더 멋있었을 것 같네요.”
여자는 윤재의 말에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잠시간을 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 내린 겨울 바다도 멋있죠. 근데 전 오늘 같이 흐린 날의 겨울 바다가 더 좋아요.”
“그러시구나. 제가 영화 러브레터를 좋아해서 설경에 대한 동경이 좀 있거든요.”
여자가 반색을 했다.
“러브레터! 이와이 지 감독 영화도 좋아해요?”
“네 뭐. 하나와 앨리스 딱 그때까지지만. 그럼 좋아했었다고 말하는 게 맞으려나? 하하.”
여자가 손으로 상을 짚으며 몸을 크게 앞으로 기울였다.
“맞아요! 저도! 저도 딱 그때까지만! 4월 이야기도 보셨죠?”
“네, 네.”
“전 4월 이야기 보면서 크게 감동했어요. 어떻게 남자가 이런 감성을 화면에 그릴 수 있나하고.”
윤재가 어색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하하. 특이하시네요. 사실 그 영화 여자주인공의 모습은 남자들이 바라는 여자 캐릭터라서 여자들은 별로 공감 못하던데.”
“또! 또! 말도 안 되는 편견! 여자들도 그 영화 좋아하는 사람 있거든요?”
“하하. 네. 뭐 그렇죠.”
윤재는 이제 여자를 처음 봤을 때 고고한 존재라고 느꼈던 감정이 다 날아가 버렸다.
게다가 이렇게 말이 잘 통하니 더 이상 그녀를 어려워할 이유 따윈 없었다.
둘은 영화 이야기로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까워지는 사이만큼 술도 많이 마셨다.
윤재도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는 편이었지만, 여자도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여자 쪽에서 먼저 술을 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자가 처음 봤을 때와 달리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우리 웃긴 게 뭔지 알아요?”
“뭐예요?”
“우리 이제까지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푸핫! 아 맞다. 전 조윤재라고 합니다.”
“전 김설영이에요.”
“아 서령씨구나!”
“서령이 아니라 설영이에요.”
여자가 이름에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꽤 특이한 이름이었다. 윤재도 그녀의 이름이 본명인지 궁금했다.
“와. 이름 예쁘다. 본명이에요?”
“네. 본명이에요.”
“그렇구나. 참 예쁘네요. 이름.”
“고마워요. 뭐 나이까지는 서로 프라이버시가 있으니까. 제가 더 어린 것 같다는 정도만 알면 되죠?”
“그럼요, 그럼요! 그걸로 충분하죠.”
설영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서렸다.
윤재는 그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예.”
허름한 화장실에 온 윤재는 볼일을 보다가 퍼뜩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감독 영화의 두 남녀는 꼭 섹스를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되려나.]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정말 자기와 섹스라도 하려는 걸까?
윤재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생각했다.
‘이런 미친 생각하지 말자! 지선이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
마음을 다잡고 화장실에서 나온 윤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두툼한 코트를 벗어 던진 설영의 몸매였다.
검정 니트가 착 달라붙어 드러난 그녀의 몸매는 정말 아름다웠다.
적당히 큰 가슴에 군살 하나 없는 팔과 배. 그야말로 근사하단 표현이 어울렸다.
윤재는 잠시 넋을 잃고 설영의 몸매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실례를 깨닫고는 재빨리 눈을 돌리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설영이 말했다.
“술이 좀 올라서 그런지 답답해서 벗었어요.”
마치 윤재가 자신의 몸매를 봤다는 걸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이었다.
윤재는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네.”
“근데 겨울 바다는 왜 혼자 오신 거예요?”
“아. 그냥. 갑자기 겨울 바다가 좀 보고 싶어서요.”
윤재는 두루뭉술하게 둘러댔다. 어차피 구구절절 설명해봐야 듣는 사람은 귀찮아질 뿐이니까.
하지만 설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인지 다시 한번 물었다.
“에이. 아까 겨울 바다 보는 분위기가 그런 게 아닌 거 같던데. 괜찮아요. 뭐 어때요. 말해 봐요. 제가 들어줄게요.
여자친구한테 차여서 혼자 겨울 바다 보러 왔다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라도 끝까지 경청할게요. 저 그런 구질구질한 이야기 좋아하거든요.”
“!”
설영의 말은 정곡이었다. 하지만 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티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설영은 초점 잃고 좌우로 방황하는 윤재의 눈동자를 보고 피식 웃었다.
“제 말이 맞군요. 구질구질한 이야기라고 해서 미안해요. 얘기 해줘요. 저 듣고 싶어요.”
설영이 그렇게 부탁했지만 윤재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고민하는 얼굴로 소주잔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설영은 가만히 기다렸다. 온화한 얼굴로 그저 묵묵히 윤재를 바라보며.
이제는 어두워진 창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수십 번쯤 반복됐을 때 윤재의 입이 천천히 떨어졌다.
“맞아요. 구질구질한 이야기에요. 정말 구질구질한.”
윤재의 말이 이어지지 않자 설영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윤재는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놓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3년을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예쁘고, 귀엽고.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였죠.
3년을 사귀자 여자친구는 결혼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죠.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결혼하자는데 싫은 남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전 날아갈 듯이 기뻤죠. 저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으니까. 근데.”
잠시 말을 멈춘 윤재가 다시 소주 한 잔을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근데 전 그녀가 조금 더 기다려줬으면 했어요.
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한심한 놈이거든요.
돈도 제대로 못 버는데 어떻게 그녀와 결혼할 수 있겠어요!
웨딩드레스를 입혀주고 싶어도! 제대로 된 집에서 살게 해주고 싶어도! 가진 게 없는데 어떻게! 전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으니까.”
설영은 진중한 표정으로 윤재의 계속되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곧 그녀와 헤어지게 됐어요.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군요. 그 남자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기로 했다며.
하하. 붙잡을 수가 없었어요. 결혼하고 싶다는 여자친구의 소원도 못 들어주던 못난 새끼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붙잡을 수 있겠어요.”
윤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충혈된 눈가에 촉촉하게 맺힌 눈물을 숨기기라도 하듯 눈을 크게 뜨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윤재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둘이서 처음으로 여행을 간 곳이었어요. 정동진은. 오늘처럼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했죠. 그때는 여자친구와 함께였지만.
그녀에게 한 번만이라도 같이 바다 가서 보고 오자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었죠.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왔던 곳에 오면 그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돌아설까 해서. 그런 멍청한 미련을 가지.고.”
윤재가 얼굴을 숙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잠시 후 눈물이 윤재의 손을 타고 테이블에 방울방울 떨어진다.
이를 지켜보던 설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울지 말아요.”
“안 울어요.”
“눈물 떨어지는 거 보이는데요?”
“콧물이에요.”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남자가 우는 거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부끄럽지 않아요. 쪽팔린 거지.”
“쪽팔리기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들 울 때 여자들이 얼마나 감동하는데요! 영화를 좋아하신다는 분이 그것도 모르세요? 아 맞다. 이터널 선샤인도 보셨죠?”
“네.”
“거기서 짐 캐리가 우는 장면 나오잖아요. 진짜 너무 멋있던데 난.”
“전 그렇게 멋있게 울지 못하니까.”
“하긴 그건 그래요.”
“풉.”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것을 놓칠 리 없는 설영이 재빨리 꼬투리를 잡았다.
“어? 지금 웃었죠?”
설영이 놀리자 윤재는 이마를 짚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고는 고개를 들었다.
“울지도 않았고, 웃지도 않았습니다.”
“어? 하하하-!”
이번엔 설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벌게진 얼굴로 눈물범벅이 된 윤재의 얼굴을 보고 나서였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다시 밝아졌다. 언제 우울했냐는 듯이 다시 웃고 떠들며 서로의 닮은 점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눈다.
즐겁게, 즐겁게.
그러다 보니 윤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얘기가 잘 통하는 여자는 처음이라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살짝 욕심까지 들었다.
그녀도 자신과 잘 맞는다고 생각할까.
취기 때문인지 윤재가 이런 즐거운 생각을 할 때 설영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이만 나갈까요?”
*
겨울의 밤바다는 무서웠다. 만약 여기가 항구였다면 선등이라도 어지러이 즐비해서 화려했을 테지만 이곳은 달랐다. 깊은 어둠만이 존재했다.
윤재와 설영은 그런 해변을 나란히 걸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말없이 걷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설영이었다.
“뭐 물어봐도 돼요?”
“못 물어볼 것도 없죠.”
“아까 돈도 제대로 못 버신다고 하셔서. 그냥 궁금해져서요. 무슨 일하시는데요?”
“아.”
윤재가 일순간 망설였다. 눈치챈 설영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기 껄끄러우면 안 하셔도.”
“글 쓰는 사람입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온 대답에 설영이 눈을 반짝였다.
“무슨 글이요?”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소설도 쓰고. 뭐 그런 사람이에요.”
설영이 발걸음을 멈추며 윤재를 향해 돌아선다.
“와! 진짜요? 그래서 그렇게 영화에 관심이 많으셨구나.”
“하하. 네. 아. 설영 씨는 무슨 일하시는지 여쭤봐도 되려나.”
“전 회사 다니다가 그만두고 쉬고 있어요. 그래서 요새 영화도 더 많이 보고 여행도 다니고 그러거든요.”
“그러시구나.”
“근데 윤재 씨는 뭐 영화 나온 거 있으세요?”
“아직은.”
“단편도?”
“단편은 누가 부탁해서 하나 써준 적 있어요.”
“뭔데요?”
“봄이 오는 곳에서라고.”
설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 그거 봤는데! 그거 윤재 씨가 쓴 거예요?”
“네.”
“와. 그거 유에포에서 엄청 뜨거웠던 영화잖아요! 저도 가슴 먹먹하게 본 건데.”
설영은 단편영화 웹사이트 이름까지 들먹이며 흥분했다. 윤재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감독이 잘 찍은 건데요 뭘.”
“그래도 대사 하나 없이 그렇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도록 한 건 윤재 씨가 쓴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죠.”
“와. 윤재 씨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좋아하는 설영의 표정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윤재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씁쓸한 미소로 중얼거렸다.
“여자친구는 별로 안 좋아했어요. 제 일도 그렇고 이런 얘기도.”
“아.”
밝아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설영은 윤재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분위기를 돌리려 애를 쓸 뿐이었다.
“그럼 주로 집에서 작업하시겠다.”
“작업은 집에서 하기도 하고 가끔 집 근처 카페에 노트북 들고 가서 하기도 해요.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돌아버릴 것 같을 때가 있거든요.”
“뭐. 그건 그렇죠.”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고요하진 않았다. 겨울 밤바다의 파도 소리는 거셌으니까.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쪽은 설영이었다.
“근데 윤재 씨 되게 멋있는 사람이에요.”
윤재가 난처한 표정으로 설영을 바라봤다.
“제가요?”
“네. 지난 사랑에 울 줄 아는 사람치고 멋지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그게 멋있는 건가요? 지질한 거 아닌가.”
“무슨 소리에요! 오히려 전 여친 욕하고 그런 새끼들이 지질한 놈들이죠! 그런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세상엔 윤재 씨처럼 착한 사람이 필요해요! 엄청 희귀하니까! 희귀종! 보호해야 할 대상!”
설영의 엉뚱한 말에 윤재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고마워요.”
윤재의 밝아진 얼굴에 설영도 만족했는지 표정이 한층 환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설영은 양 손으로 자기 팔을 감싸며 말했다.
“아 춥다.”
윤재가 발걸음을 멈추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 이제 갈까요?”
“어딜요?”
당돌하게 쳐다보는 설영의 깊은 눈빛에 윤재는 내심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네? 아아 가, 각자 오늘 묵을 곳으로 가자는 거죠.”
“아아. 그 얘기구나.”
“네, 네.”
수긍하는 듯 고개를 바로 했던 설영이 윤재를 다시 홱 바라보았다.
“근데 그러면 돈 아깝잖아요?”
“네?”
“한 명이 묵나 두 명이 묵나 가격은 똑같은데 우리 같이 묵으면 되잖아요?”
이 여자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윤재는 정신이 아득해져 잠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놀라는 윤재에 비해 설영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뭘 그리 놀래요? 1박 같이 하는 게 그리 어려운 건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다 큰 남녀가 같이.”
“그럼 다 큰 남녀가 같이 자지 미성년자가 같이 자요? 이상한 사고방식이시네.”
“아뇨. 그런 얘기도 아닌데. 아무튼 처음 본 사이인데 어떻게 그래요.”
“뭘 어떻게 그래요. 아 이상한 생각하시는구나? 이상한 생각 하셔서 못 같이 못 잔다는 거구나? 윤재 씨한텐 잔다는 말이 다 그런 말로 들려요? 저질이시네.”
뻔뻔했다.
설영은 너무나도 뻔뻔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럴싸한 논리로 포장해가며 열심히 윤재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윤재도 마냥 그렇게 밀릴 수만은 없었다.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응수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쵸? 윤재 씨 그런 저질 아니죠? 그러니까 따라와요.”
설영은 윤재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끌려가는 윤재는 머릿속으로 또다시 이 말을 되뇔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 도대체 뭐지?
청량리역에는 많은 사람이 붐볐다.
역사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윤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윤재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침이 8자 부근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지선과 약속을 한 시간은 아침 7시.
한 시간이 이상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착잡해진 윤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의 절정으로 향하는 12월 중순이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윤재의 입김이 흩뿌려졌다.
윤재는 생각했다.
역시 안 오려는 모양이다.
약속은 아니었다. 사실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별을 고한 여자친구를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아니 붙잡기 위해 마음대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기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윤재는 연락을 해볼까도 싶었지만 금세 마음을 접었다.
그녀가 이별을 말한 후 자신의 모든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잊어야겠지. 이십 대 후반에서 서른두 살이 될 때까지 함께한 여자친구를.
윤재는 그렇게 생각하며 코를 훌쩍였다.
추워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윤재는 코를 훌쩍이며 역사 안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혼자서라도 떠날 요량이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겨울 바다를 보고 오면 좀 괜찮아지리라 생각하며.
*
“정동진역 한 장이요.”
윤재는 정동진행 기차표를 하나 샀다. 그리고는 뒤이어 기차표를 구매하는 여자를 지나쳐 기차를 타러 갔다.
기차는 버스나 지하철과 달리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들뜨거나 설레는 마음이랄까? 하지만 지금의 윤재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조용히 앉아 착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기차가 출발했다.
서울을 벗어나자 겨울의 쓸쓸한 풍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이라도 쌓였으면 눈부신 설경이 장관이었겠지만, 지금은 바싹 말라 얼어붙은 논밭과 앙상한 나무들이 을씨년스러웠다.
기차가 출발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윤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 말이다.
하지만 정동진까지는 거의 6시간을 가야 했다. 아무리 울적한 기분의 윤재라도 6시간 동안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윤재는 기차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주전부리가 담긴 카트가 다니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카페 칸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이 두 명을 데리고 앉아 있는 부부와 맥주를 마시고 있는 아저씨 한 명이 다였다.
아저씨는 맥주에 오징어를 먹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기차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는 술을 좋아하는 윤재에겐 굉장한 유혹이었다.
윤재가 직원에게 다가갔다.
“맥주 하나랑 오징어 하나 주세요.”
결국 윤재도 맥주와 오징어를 구입해서 남아 있는 자리에 앉았다.
맥주 캔을 따자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윤재는 이 소리를 언제 들어도 짜릿했다.
소리뿐이랴. 맥주를 한 모금 크게 넘기고 오징어를 씹을 때의 그 쾌감! 윤재는 이별에 대한 아픔도 잠시 잊고 맥주 맛에 취했다.
그때 카페 칸에 들어온 여자 한 명이 직원에게 가서 맥주를 구입했다.
“맥주 하나요.”
맥주를 달라는 이야기에 윤재의 고개가 자기도 모르게 돌아갔다.
씹을 거리도 없이 맥주만 구입한 여자는 남아 있는 자리에 가서 창밖을 바라보며 맥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윤재는 그런 여자의 분위기가 꽤 근사하다고 느꼈다.
게다가 평소였으면 흘깃거릴 정도의 미모였지만 이별의 아픔이 남아 있는 그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윤재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맥주 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맥주는 어느새 다 떨어져 있었다.
오징어도 약간 남아 있고 해서 윤재는 맥주를 한 캔 더 사기로 했다.
“저기 맥주 하나만 더 주세요.”
윤재는 다시 맥주를 사가 지고 와 홀짝이기 시작했다.
*
윤재는 맥주도 마셨다.
의자에 앉아 깊은 잠도 잤다.
핸드폰도 만지작거렸다.
하염없이 풍경도 바라봤다.
윤재가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후에야 기차는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6시간은 꽤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정동진역에 내린 윤재는 눈앞에 겨울 바다가 펼쳐지자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흔히 정동진역을 바다에 가장 가까운 역이라고 말한다.
그 표현 그대로 정동진역과 바다 사이에는 넓지 않은 모래 해변만이 위치했다.
윤재는 해변에 가보기로 했다. 토요일이었지만 그리 맑은 날씨도 아니었고 바람도 꽤 많이 불었다.
그런 날씨 탓일까? 역에서부터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으면 특정 인물이 눈에 쉽게 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여자가 윤재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갈색의 롱코트를 입고 자주색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아 반쯤 가린 상태였다.
하지만 윤재는 목도리 위로 드러난 그녀의 눈매만으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기차 카페에서 홀로 맥주를 마시던 여자였다.
윤재는 혼자서 역사를 빠져나가는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혼자 여행 온 건가? 멋있네.’
기차 카페에서도 그랬고, 홀로 걷고 있는 그녀의 지금 모습에서도 분명 어떤 고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윤재는 그녀의 그런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호감이 간다는 표현이 옳았다.
하지만 윤재는 금세 고개를 흔들어 그런 잡념을 떨쳐버렸다.
남자란 얼마나 간사한 생물인가.
연인과 헤어져 죽을 만큼 힘들어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눈이 돌아가는 게 남자란 생물이다.
윤재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런 생물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만 풀릴 리 없다.
역사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윤재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해변으로 향하는 윤재와 행선지가 같은 모양이었다.
물론 함께 해변으로 향한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녀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이 길은 그저 공통의 목적지로 향하는 경로일 뿐이었다.
어쨌든 윤재는 그녀에게서 최대한 신경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겨울의 해변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시린 옥빛의 겨울 바다.
잿빛 하늘과 어울리게 맞닿아 섬뜩하리만치 고고했고, 마치 흰 눈이라도 흩뿌려놓은 것처럼 부서지는 파도는 경외감을 느낄 정도로 장엄했다.
순간적으로 윤재의 머릿속에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희로애락이란 기본적인 감정이 잠깐이나마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윤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충분한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져 힘들고 괴롭던 마음이 잠시나마 잊혔기 때문이다.
번쩍임과 같았던 순간이 지나고 윤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보러오길 잘했다. 여기라면 그녀를 잊을 수 있을.
찰칵! 찰칵! 찰칵!
해탈과도 같은 경지에 올라 들떠있던 윤재의 생각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메라의 셔터 소리였다.
살짝 못마땅해진 윤재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기차에서 홀로 맥주를 홀짝이고, 해변까지 걸어오며 유독 눈에 띄던 그녀였다.
그녀는 윤재가 쳐다보는 동안에도 분주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여자의 얼굴을 반쯤 감았던 자주색 목도리는 어느새 턱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윤재가 기차에서도 보고, 걸어오면서도 봤던 여자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카메라 뷰파인더에서 가끔 눈을 떼며 모니터를 확인하는 그녀에게서 윤재는 가장 먼저 이렇게 느꼈다.
하얗다.
그녀의 피부는 정말 말 그대로 하얗다. 이것저것 수식어를 더할 것도 없었다. 그냥 하얗다.
새하얀 피부에 빼앗긴 정신이 돌아오자 다음으로는 그녀의 이목구비가 윤재의 눈에 들어왔다.
옆모습인지라 역시 오뚝한 콧날이 제일 먼저 보였고, 그다음은 무심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 마지막은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이었다.
윤재는 그녀를 잠깐 바라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분명 강렬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런 매력, 아니 마력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윤재는 생각했다.
왠지 범접지 못할 그녀 특유의 분위기가 저 겨울 바다를 닮았다고.
특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저 무심한 눈빛이.
“응?”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 냈다.
어느샌가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자신도 얼결에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을 깨달은 윤재는 무안한 마음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은 한 동안 계속되었다.
윤재는 바다에 최대한 신경을 집중한 채 그녀를 무시하며 민망한 상황을 견뎌냈다.
잠시 후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다시 들리고 나서야 윤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랐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힘들어서 겨울 바다를 보러 온 건데, 그 와중에도 다른 여자에게 눈길이 쏠린 자신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난 다를 줄 알았는데 여느 남자들과 똑같은 새끼구나.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네. 이렇게 잊을 수 있으니.’
“저기요.”
다시 감상에 젖으며 열반의 경지에 들려는 윤재가 또 방해받았다.
이번엔 카메라 셔터 소리도 아닌 여자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소리가 난 쪽은 바로 옆쪽이었다.
겨울 바다를 카메라에 담던 그녀에게서 말이다.
왜 쳐다봤냐고 자신을 질책이라도 하려는 걸까?
윤재는 쓸데없는 걱정에 최대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윤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 압도당한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요.?”
윤재의 어리숙한 되물음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상대의 의사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윤재가 얼결에 카메라를 받아서 들자 여자는 몇 걸음 물러나 바다를 등지고 섰다. 찍어 달라는 의미였다.
윤재는 카메라와 여자를 번갈아 보며 이 상황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사진 촬영 부탁은 여행지에서 흔한 일이라 생각은 길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뷰파인더 안에 여자의 모습을 담았다.
‘진짜 예쁘게 생겼구나.’
겨울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여자의 모습에 윤재는 새삼 느꼈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고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는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여자의 사진을 한 장 찍은 윤재는 카메라를 건네주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여자는 카메라를 받기는커녕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뭐예요?”
“예? 카메라 돌려드리는 건데.”
여자는 잠시 어이없다는 눈길로 윤재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니. 겨우 한 장 찍은 거예요? 이리저리 여러 장 좀 찍어주세요.”
“아. 네.”
윤재와 여자의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윤재는 여자를 카메라 뷰파인더에 재차 담으며 투덜거렸다.
“아니. 내가 자기 사진기사야 뭐야.”
물론 여자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 크기는 아니었다.
여자는 바다를 바라보거나 하늘을 바라보는 등의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투덜거리던 윤재도 매력적인 여자의 모습에 넋을 잃고 셔터를 눌러댔다.
잠시 후 꽤 여러 장의 사진이 찍히고 윤재는 카메라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여자는 카메라를 받아서 들고 찍힌 사진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윤재는 그런 그녀의 앞에 서 있기도 뭐해서 슬쩍 고개를 까딱이곤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윤재의 뒤에서 또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윤재가 돌아보자 여자가 다가와 카메라를 보여준다.
“아니. 사진이 이게 뭐예요. 전 작게 찍고 배경만 잔뜩 찍어놨네.”
“예? 아. 제가 사진 찍는 스타일이 원래 그래서.”
“아니. 그쪽이 뭐 프로 사진작가예요? 무슨 본인 스타일을 따져요. 저를 찍어달라고요. 저를.”
여자가 카메라를 윤재에게 들이밀었다. 다시 찍어 달라는 의미였다.
윤재는 뭐라고 따지지도 못한 채 다시 카메라를 받아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번엔 그녀의 요구대로 상반신 위주의 구도였다.
그 와중에도 윤재는 무언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다 뷰파인더 안에 담긴 그녀의 모습에 그 이질적인 느낌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보기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녀의 외모는 분명 세상 모든 일에 초연할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아까부터 느낀 그녀의 말투나 성격은 분명 그런 외모와는 정반대였다.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청아한 목소리로 우아한 말들이 흘러나오기는커녕 드세고 급한 성격의 괄괄한 말들만 쏟아지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에 잠겨 윤재는 한동안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그저 뷰파인더에 눈을 바짝 대고 여자의 외모와 상반되는 성격에 정신을 빼앗겼다.
윤재의 움직임이 없자 여자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뭐해요?”
하지만 윤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여전히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카메라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런 윤재의 자세는 꽤 웃겼다.
허리부터 목까지 구부정한 자세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자세를 보면 누구든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에 살짝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웃음은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는 윤재의 눈에 확실하게 들어왔다.
“아.”
나지막한 감탄이 윤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윤재의 손가락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움직인 손가락이었다.
윤재는 카메라에서 얼굴을 떼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이었다.
굉장히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사람을 홀릴 정도의.
그리고 그 사람이란 부류엔 당연히 윤재도 포함되었다.
여자에게서 웃음이 사라지자 윤재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그 모습이 카메라에 저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재빨리 카메라를 조작해 사진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내 희고 가느다란 손이 윤재의 시야에 들어오며 카메라를 낚아채 갔다.
윤재가 고개를 들자 카메라를 든 여자가 쏘아붙였다.
“남의 카메라를 왜 뒤져요?”
“예? 예? 아, 아니. 죄, 죄송해요.”
여자는 윤재를 한 번 노려보고는 카메라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 사진들을 확인했다.
아까는 이런 상황에서 떠났을 윤재였지만 지금은 쭈뼛거리며 자리를 지켰다.
왠지 그녀가 다시 찍어 달라고 하면 그래야 할 거 같은 어떤 책임감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분위기였다. 사진을 본 여자의 반응이 꽤 괜찮았다.
“이 봐요.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네. 이게 사진이지 괜히 어설픈 예술작품 흉내 내지 말아요.”
말하는 여자의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히 윤재에게 하는 말이었다.
윤재는 그녀가 쳐다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여자에게서 몸을 돌리며 윤재는 생각했다.
‘이제 저 여자한테 방해받지 말고 겨울 바다를 감상하자. 그리고 겨울 바다를 안주 삼아 회에 소주나 한잔하며 지선이나 잊자.’
발걸음을 옮기는 윤재의 마음이 다시 촉촉하게 감상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자가 그런 윤재의 감성을 부숴버렸다.
“저기요!”
내적 여행을 떠나려고 할 때마다 번번이 여자에게 방해를 받은 윤재였다. 그녀를 돌아보는 표정이 고울 리 없었다.
윤재는 잔뜩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또 왜요.”
어느새 카메라를 가방에 넣은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윤재에게 다가왔다.
“겨울 바다 보러 혼자 오신 거예요?”
“네.”
“저도 혼자 왔는데.”
여자의 말에 윤재는 무심코 안다고 대답할 뻔했다.
그녀가 혼자인 것을 오늘 여러 번 봤으니까.
마음에 있던 말을 겨우 삼킨 윤재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근데요?”
“아니. 사진 찍어준 것도 고맙고, 또 제가 너무 무례했던 거 같아서. 어때요?”
“뭐가요?”
“회에 소주 한 잔 안 하실래요? 제가 살게요.”
윤재는 잠시 멍하니 여자를 바라봤다.
이 세상 혼자 살 거 같은 분위기를 가진 여자가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 거지.
여행지에서 여자가 남자한테 소주 한잔하자고 하는 일이 요새는 유행인 건가.
자신이 여행을 안 다닌 사이 이런 풍습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당연히 그런 건 아니리라.
하지만 윤재가 쓰던 시나리오, 또 즐겨보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 분명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윤재의 대답이 없었지만, 여자는 막무가내로 앞장섰다.
“자. 가요.”
여자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윤재는 쉽사리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 여행은 이제는 자신을 떠나버린 여자친구를 잊기 위한 혼자만의 이별 여행이었다.
혼자 바다를 보고, 혼자 소주를 마시며, 혼자 울적한 마음으로 잠들어야 했다.
하지만 막연히 세웠던 그런 계획들이 저 여자에 의해 하나씩 부서지고 있었다.
그때 앞서간 여자의 목소리가 겨울의 파도 소리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아-! 안 오고 뭐 해요!”
겨울의 해변엔 윤재와 그녀 두 사람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많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그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큰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리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윤재는 그제야 여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저 여자 도대체 뭐야!’
끊임없이 그렇게 되뇌며.
*
여자가 윤재를 데리고 간 곳은 바다가 보이는 작은 횟집이었다.
요샌 크고 화려한 건물에 여러 개의 횟집이 들어찬 회센터라고 불리는 곳이 즐비했다.
하지만 용케도 이런 작은, 어떻게 보면 허름하기까지 한 횟집을 여자가 찾았는지 윤재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방바닥에 앉으며 두리번거리는 윤재를 보며 마음이라도 읽었는지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아. 제가 원래 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해서요. 아까 오다가 눈여겨봤죠. 꼭 우리나라 단편영화에 나올 거 같지 않아요?”
“네?”
윤재가 살짝 올라간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언가에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여자가 그 반응을 놓치지 않는다.
“왜요?”
“아뇨. 단편영화라고 해서.”
“아아. 제가 영화 보는 걸 좀 좋아하다 보니 이것저것 많이 보거든요. 그래서 그랬어요.”
“그러시구나.”
윤재가 수긍하고 나자 여자는 우럭회와 소주를 시켰다.
이번에도 윤재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고른 메뉴였다. 하지만 윤재도 가리는 메뉴는 없기에 딱히 상관은 없었다.
잠시 후 회가 나오자 여자는 소주병을 들어 윤재에게 한 잔 따랐다.
윤재는 황급하게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술을 받고는, 여자에게도 술을 따랐다.
두 사람의 잔에 술이 채워지자 여자가 말했다.
“자 건배.”
“아 네.”
윤재와 건배를 한 여자는 거침없이 소주를 원샷했다.
여자는 소주를 마시는 모습조차 매력 있었다. 게다가 대뜸 원샷이라니!
멍하니 보던 윤재는 소주를 마신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얼른 술을 마셨다.
여자는 간장을 살짝 찍은 회 한 점을 입에 넣어 씹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죽인다.”
여자의 입에서 중얼거리듯 나온 말에 윤재는 살짝 헛기침을 했다.
여자의 죽인다는 말은 살아 있는 무언가의 숨을 끊는다는 말은 분명 아니었다.
그녀가 마신 소주가 죽인다는 것일 수도 있고, 입에 들어간 회 한 점의 맛이 죽인다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 바다의 풍경이 죽인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이 합쳐진 뜻이거나 말이다.
어떤 의미이든 그녀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었다. 그래서 윤재도 헛기침을 한 것이다.
근사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겨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윤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근데.”
여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윤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빛에 윤재는 잠시 숨이 막혔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하려던 말을 했다.
“정말 사진 찍어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술 사는 건가요?”
여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윤재를 빤한 눈길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윤재는 적잖이 당황스러웠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뭐 헌팅이라도 했다고 생각해요?”
윤재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당황하는 윤재의 모습이 재미라도 있었는지, 여자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미소는 너무나도 옅어서 윤재가 명확하게 인식하기도 전에 금세 사라졌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 낮술이란 영화가 있거든요. 거기서 남자 주인공이 여행지에서 만난 여자 때문에 한겨울 산에 내버려지는 장면이 나와요.”
여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윤재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런 무서운 일이라도 당할까 봐 그래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신기해서 그랬어요.”
“신기할 일도 많네요.”
여자는 소주병을 들어 혼자 술을 따르려 했다. 윤재가 잽싸게 병을 낚아채 여자의 잔에 술을 채워준다.
여자의 잔에 술을 채운 윤재는 이어서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영화 보는 거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네. 아까도 말했듯이 많이 챙겨보는 편이에요.”
“낮술이란 영화를 얘기하실 정도니까 뭐. 그러실 거 같아요.”
“그 영화 사람들 꽤 많이 봤잖아요?”
“그렇긴 하죠. 워낭소리 때문에 독립영화가 한참 주목받을 때라 시기도 좋았고, 나중에 재밌다고 입소문도 탔었으니까.
그래도 그런 영화는 관심 있는 사람만 보지 잘 챙겨보진 않잖아요.”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윤재는 아차 싶었다. 너무 잘난 체했나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여자의 기분에 거슬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처럼 금세 사라지거나 하는 미소가 아니었다.
여자가 온유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맞아요. 잘 아시네요. 그쪽도 영화 많이 보시나 보다.”
윤재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대답했다.
“네. 저도 좀 보는 편이에요.”
“어떤 장르 좋아하시는데요?”
물어보는 여자의 몸이 처음으로 윤재 쪽으로 기울어졌다.
윤재도 잘 아는 화제가 나와서인지 아까보다 훨씬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장르 거의 가리지 않는 편이에요. 공포영화부터 액션, 로맨스 다 좋아하거든요. 뭐 굳이 하나 꼽기가 힘드네요. 하하.”
.“잡식성이시네. 뭐 저도 그런 편이니까.”
잠시 말이 끊어졌던 여자는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듯 윤재에게 말했다.
“혹시 홍상수 감독 영화도 봐요?”
“그럼요! 당연하죠. 홍상수 감독 영화도 보세요? 아니 그 영화 여자들 별로 안 좋아하는데.”
윤재의 말에 여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편견은 버려요. 홍상수 감독 영화 좋아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가? 하하.”
분위기가 좋아졌다.
많이.
둘이 술잔을 주고받은 뒤 여자가 말했다.
“지금 이 상황 좀 홍상수 감독 영화 같지 않아요?”
여자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윤재가 무릎을 탁! 쳤다.
“아! 맞아요!”
윤재가 동의하자 여자의 목소리가 한층 올라갔다.
“그렇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랑 술을 마신다. 그 감독 영화 주요 내용 중 하나잖아요.
우리 상황도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술을 마시고 있으니 딱 맞네요.”
“하하하-! 신기하네요!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홍상수 감독 영화가 묘하게 리얼하잖아요? 컷바이컷 없이 한 장면이 거의 원테이크로 가면서 배경음악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그리고 영화의 대부분이 술, 섹스, 잡담. 이 세 개로 풀잖아요.”
윤재는 적잖이 당황했다. 여자의 입에서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영화용어들이 쏟아져 나온 건 둘째치고 섹스라는 단어가 거침없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사실 그 세 개가 그 감독 영화를 나타내는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더 리얼한 거예요. 사실 사람 인생이랄 게 뭐가 있어요? 거의 그 세 가지 아니에요?”
여자의 목소리가 꽤 올라갔다.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윤재가 미소 띤 얼굴로 받아주었다.
“저도 그래서 어릴 땐 홍상수 감독 영화가 완전 재미없었어요. 근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남자들의 지질한 모습에 괜히 실실 웃음도 나면서.”
“와-! 그쪽 뭘 좀 아시네요! 얘기가 이렇게 잘 통하는 사람 찾기 힘든데!”
한껏 밝아진 얼굴의 여자가 잔을 들며 말을 이었다.
“자 짠!”
분위기가 좋아지니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횟수도 빈번하게 늘어났다.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와중에 여자가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감독 영화의 두 남녀는 꼭 섹스를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되려나.”
여자의 시선은 윤재에게 향하지도 않았고, 목소리도 작았다. 하지만 바로 앞에 앉아있는 윤재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윤재의 눈이 놀란 토끼 눈이 됐다. 눈을 크게 뜨고 여자를 바라보았지만, 여자는 고개를 돌린 채 윤재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잠시 횟집에 적막이 흘렀다. 윤재와 여자를 제외한 손님도 없기에 더욱 조용했다.
멀리서 겨울 바다의 성난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정도였다.
묘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윤재는 재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오, 오늘 눈이 왔으면 더 멋있었을 것 같네요.”
여자는 윤재의 말에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잠시간을 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 내린 겨울 바다도 멋있죠. 근데 전 오늘 같이 흐린 날의 겨울 바다가 더 좋아요.”
“그러시구나. 제가 영화 러브레터를 좋아해서 설경에 대한 동경이 좀 있거든요.”
여자가 반색을 했다.
“러브레터! 이와이 지 감독 영화도 좋아해요?”
“네 뭐. 하나와 앨리스 딱 그때까지지만. 그럼 좋아했었다고 말하는 게 맞으려나? 하하.”
여자가 손으로 상을 짚으며 몸을 크게 앞으로 기울였다.
“맞아요! 저도! 저도 딱 그때까지만! 4월 이야기도 보셨죠?”
“네, 네.”
“전 4월 이야기 보면서 크게 감동했어요. 어떻게 남자가 이런 감성을 화면에 그릴 수 있나하고.”
윤재가 어색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하하. 특이하시네요. 사실 그 영화 여자주인공의 모습은 남자들이 바라는 여자 캐릭터라서 여자들은 별로 공감 못하던데.”
“또! 또! 말도 안 되는 편견! 여자들도 그 영화 좋아하는 사람 있거든요?”
“하하. 네. 뭐 그렇죠.”
윤재는 이제 여자를 처음 봤을 때 고고한 존재라고 느꼈던 감정이 다 날아가 버렸다.
게다가 이렇게 말이 잘 통하니 더 이상 그녀를 어려워할 이유 따윈 없었다.
둘은 영화 이야기로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까워지는 사이만큼 술도 많이 마셨다.
윤재도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는 편이었지만, 여자도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여자 쪽에서 먼저 술을 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자가 처음 봤을 때와 달리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우리 웃긴 게 뭔지 알아요?”
“뭐예요?”
“우리 이제까지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푸핫! 아 맞다. 전 조윤재라고 합니다.”
“전 김설영이에요.”
“아 서령씨구나!”
“서령이 아니라 설영이에요.”
여자가 이름에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꽤 특이한 이름이었다. 윤재도 그녀의 이름이 본명인지 궁금했다.
“와. 이름 예쁘다. 본명이에요?”
“네. 본명이에요.”
“그렇구나. 참 예쁘네요. 이름.”
“고마워요. 뭐 나이까지는 서로 프라이버시가 있으니까. 제가 더 어린 것 같다는 정도만 알면 되죠?”
“그럼요, 그럼요! 그걸로 충분하죠.”
설영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서렸다.
윤재는 그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예.”
허름한 화장실에 온 윤재는 볼일을 보다가 퍼뜩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감독 영화의 두 남녀는 꼭 섹스를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되려나.]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정말 자기와 섹스라도 하려는 걸까?
윤재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생각했다.
‘이런 미친 생각하지 말자! 지선이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
마음을 다잡고 화장실에서 나온 윤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두툼한 코트를 벗어 던진 설영의 몸매였다.
검정 니트가 착 달라붙어 드러난 그녀의 몸매는 정말 아름다웠다.
적당히 큰 가슴에 군살 하나 없는 팔과 배. 그야말로 근사하단 표현이 어울렸다.
윤재는 잠시 넋을 잃고 설영의 몸매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실례를 깨닫고는 재빨리 눈을 돌리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설영이 말했다.
“술이 좀 올라서 그런지 답답해서 벗었어요.”
마치 윤재가 자신의 몸매를 봤다는 걸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이었다.
윤재는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네.”
“근데 겨울 바다는 왜 혼자 오신 거예요?”
“아. 그냥. 갑자기 겨울 바다가 좀 보고 싶어서요.”
윤재는 두루뭉술하게 둘러댔다. 어차피 구구절절 설명해봐야 듣는 사람은 귀찮아질 뿐이니까.
하지만 설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인지 다시 한번 물었다.
“에이. 아까 겨울 바다 보는 분위기가 그런 게 아닌 거 같던데. 괜찮아요. 뭐 어때요. 말해 봐요. 제가 들어줄게요.
여자친구한테 차여서 혼자 겨울 바다 보러 왔다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라도 끝까지 경청할게요. 저 그런 구질구질한 이야기 좋아하거든요.”
“!”
설영의 말은 정곡이었다. 하지만 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티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설영은 초점 잃고 좌우로 방황하는 윤재의 눈동자를 보고 피식 웃었다.
“제 말이 맞군요. 구질구질한 이야기라고 해서 미안해요. 얘기 해줘요. 저 듣고 싶어요.”
설영이 그렇게 부탁했지만 윤재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고민하는 얼굴로 소주잔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설영은 가만히 기다렸다. 온화한 얼굴로 그저 묵묵히 윤재를 바라보며.
이제는 어두워진 창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수십 번쯤 반복됐을 때 윤재의 입이 천천히 떨어졌다.
“맞아요. 구질구질한 이야기에요. 정말 구질구질한.”
윤재의 말이 이어지지 않자 설영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윤재는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놓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3년을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예쁘고, 귀엽고.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였죠.
3년을 사귀자 여자친구는 결혼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죠.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결혼하자는데 싫은 남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전 날아갈 듯이 기뻤죠. 저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으니까. 근데.”
잠시 말을 멈춘 윤재가 다시 소주 한 잔을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근데 전 그녀가 조금 더 기다려줬으면 했어요.
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한심한 놈이거든요.
돈도 제대로 못 버는데 어떻게 그녀와 결혼할 수 있겠어요!
웨딩드레스를 입혀주고 싶어도! 제대로 된 집에서 살게 해주고 싶어도! 가진 게 없는데 어떻게! 전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으니까.”
설영은 진중한 표정으로 윤재의 계속되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곧 그녀와 헤어지게 됐어요.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군요. 그 남자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기로 했다며.
하하. 붙잡을 수가 없었어요. 결혼하고 싶다는 여자친구의 소원도 못 들어주던 못난 새끼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붙잡을 수 있겠어요.”
윤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충혈된 눈가에 촉촉하게 맺힌 눈물을 숨기기라도 하듯 눈을 크게 뜨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윤재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둘이서 처음으로 여행을 간 곳이었어요. 정동진은. 오늘처럼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했죠. 그때는 여자친구와 함께였지만.
그녀에게 한 번만이라도 같이 바다 가서 보고 오자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었죠.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왔던 곳에 오면 그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돌아설까 해서. 그런 멍청한 미련을 가지.고.”
윤재가 얼굴을 숙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잠시 후 눈물이 윤재의 손을 타고 테이블에 방울방울 떨어진다.
이를 지켜보던 설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울지 말아요.”
“안 울어요.”
“눈물 떨어지는 거 보이는데요?”
“콧물이에요.”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남자가 우는 거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부끄럽지 않아요. 쪽팔린 거지.”
“쪽팔리기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들 울 때 여자들이 얼마나 감동하는데요! 영화를 좋아하신다는 분이 그것도 모르세요? 아 맞다. 이터널 선샤인도 보셨죠?”
“네.”
“거기서 짐 캐리가 우는 장면 나오잖아요. 진짜 너무 멋있던데 난.”
“전 그렇게 멋있게 울지 못하니까.”
“하긴 그건 그래요.”
“풉.”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것을 놓칠 리 없는 설영이 재빨리 꼬투리를 잡았다.
“어? 지금 웃었죠?”
설영이 놀리자 윤재는 이마를 짚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고는 고개를 들었다.
“울지도 않았고, 웃지도 않았습니다.”
“어? 하하하-!”
이번엔 설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벌게진 얼굴로 눈물범벅이 된 윤재의 얼굴을 보고 나서였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다시 밝아졌다. 언제 우울했냐는 듯이 다시 웃고 떠들며 서로의 닮은 점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눈다.
즐겁게, 즐겁게.
그러다 보니 윤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얘기가 잘 통하는 여자는 처음이라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살짝 욕심까지 들었다.
그녀도 자신과 잘 맞는다고 생각할까.
취기 때문인지 윤재가 이런 즐거운 생각을 할 때 설영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이만 나갈까요?”
*
겨울의 밤바다는 무서웠다. 만약 여기가 항구였다면 선등이라도 어지러이 즐비해서 화려했을 테지만 이곳은 달랐다. 깊은 어둠만이 존재했다.
윤재와 설영은 그런 해변을 나란히 걸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말없이 걷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설영이었다.
“뭐 물어봐도 돼요?”
“못 물어볼 것도 없죠.”
“아까 돈도 제대로 못 버신다고 하셔서. 그냥 궁금해져서요. 무슨 일하시는데요?”
“아.”
윤재가 일순간 망설였다. 눈치챈 설영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기 껄끄러우면 안 하셔도.”
“글 쓰는 사람입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온 대답에 설영이 눈을 반짝였다.
“무슨 글이요?”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소설도 쓰고. 뭐 그런 사람이에요.”
설영이 발걸음을 멈추며 윤재를 향해 돌아선다.
“와! 진짜요? 그래서 그렇게 영화에 관심이 많으셨구나.”
“하하. 네. 아. 설영 씨는 무슨 일하시는지 여쭤봐도 되려나.”
“전 회사 다니다가 그만두고 쉬고 있어요. 그래서 요새 영화도 더 많이 보고 여행도 다니고 그러거든요.”
“그러시구나.”
“근데 윤재 씨는 뭐 영화 나온 거 있으세요?”
“아직은.”
“단편도?”
“단편은 누가 부탁해서 하나 써준 적 있어요.”
“뭔데요?”
“봄이 오는 곳에서라고.”
설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 그거 봤는데! 그거 윤재 씨가 쓴 거예요?”
“네.”
“와. 그거 유에포에서 엄청 뜨거웠던 영화잖아요! 저도 가슴 먹먹하게 본 건데.”
설영은 단편영화 웹사이트 이름까지 들먹이며 흥분했다. 윤재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감독이 잘 찍은 건데요 뭘.”
“그래도 대사 하나 없이 그렇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도록 한 건 윤재 씨가 쓴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죠.”
“와. 윤재 씨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좋아하는 설영의 표정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윤재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씁쓸한 미소로 중얼거렸다.
“여자친구는 별로 안 좋아했어요. 제 일도 그렇고 이런 얘기도.”
“아.”
밝아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설영은 윤재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분위기를 돌리려 애를 쓸 뿐이었다.
“그럼 주로 집에서 작업하시겠다.”
“작업은 집에서 하기도 하고 가끔 집 근처 카페에 노트북 들고 가서 하기도 해요.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돌아버릴 것 같을 때가 있거든요.”
“뭐. 그건 그렇죠.”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고요하진 않았다. 겨울 밤바다의 파도 소리는 거셌으니까.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쪽은 설영이었다.
“근데 윤재 씨 되게 멋있는 사람이에요.”
윤재가 난처한 표정으로 설영을 바라봤다.
“제가요?”
“네. 지난 사랑에 울 줄 아는 사람치고 멋지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그게 멋있는 건가요? 지질한 거 아닌가.”
“무슨 소리에요! 오히려 전 여친 욕하고 그런 새끼들이 지질한 놈들이죠! 그런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세상엔 윤재 씨처럼 착한 사람이 필요해요! 엄청 희귀하니까! 희귀종! 보호해야 할 대상!”
설영의 엉뚱한 말에 윤재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고마워요.”
윤재의 밝아진 얼굴에 설영도 만족했는지 표정이 한층 환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설영은 양 손으로 자기 팔을 감싸며 말했다.
“아 춥다.”
윤재가 발걸음을 멈추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 이제 갈까요?”
“어딜요?”
당돌하게 쳐다보는 설영의 깊은 눈빛에 윤재는 내심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네? 아아 가, 각자 오늘 묵을 곳으로 가자는 거죠.”
“아아. 그 얘기구나.”
“네, 네.”
수긍하는 듯 고개를 바로 했던 설영이 윤재를 다시 홱 바라보았다.
“근데 그러면 돈 아깝잖아요?”
“네?”
“한 명이 묵나 두 명이 묵나 가격은 똑같은데 우리 같이 묵으면 되잖아요?”
이 여자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윤재는 정신이 아득해져 잠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놀라는 윤재에 비해 설영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뭘 그리 놀래요? 1박 같이 하는 게 그리 어려운 건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다 큰 남녀가 같이.”
“그럼 다 큰 남녀가 같이 자지 미성년자가 같이 자요? 이상한 사고방식이시네.”
“아뇨. 그런 얘기도 아닌데. 아무튼 처음 본 사이인데 어떻게 그래요.”
“뭘 어떻게 그래요. 아 이상한 생각하시는구나? 이상한 생각 하셔서 못 같이 못 잔다는 거구나? 윤재 씨한텐 잔다는 말이 다 그런 말로 들려요? 저질이시네.”
뻔뻔했다.
설영은 너무나도 뻔뻔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럴싸한 논리로 포장해가며 열심히 윤재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윤재도 마냥 그렇게 밀릴 수만은 없었다.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응수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쵸? 윤재 씨 그런 저질 아니죠? 그러니까 따라와요.”
설영은 윤재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끌려가는 윤재는 머릿속으로 또다시 이 말을 되뇔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 도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