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

구름 많음
2024.09.1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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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

아내와 이혼하면서 나는 세상에서 단절되고 소외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혼할 거리도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고, 그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소지가 분명한데

이렇게 이혼하게 된 것을 두고 너무 성급한 행동이 아니었느냐고 얘기했다.



아내와 내가 감정적으로 서로 맞붙게 된 것은 오로지 끼니가 그 주된 요인이었다.

나의 직업상 나는 집에 들어가서 주방에 들어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점을 아내는 맨 처음 이해하질 못했다.

온종일 식자재와 음식 냄새로 지칠 대로 지친 내가 집에 들어가서 밥상만 덜렁 받은 채,

염치없이-아내의 표현에 의한다면- 몸만 쏙 빠져나와서 소파에 널브러지는 것을 기어이 두고 보질 못했던 것이다.



결혼식에 모인 사람들은 신랑 될 사람이 요리사이니 이제 음식 걱정은 은퇴해도 되겠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실상은 그렇게 달랐다.

만일 내가 다른 요리사들처럼 특징 있는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다면,

예를 들어 전통 중국요리라든가 프랑스 요리 등을 했었더라면 지금의 상황은 좀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러나, 나의 주 전문은 파티 뷔페였다.

가뜩이나 줄줄이 연이어 있는 이벤트와 행사, 가족 모임에 캐더링 서비스나 뷔페 식단을 책임지다 보면 많은 식자재를 다루어야 하고

빨리 세팅을 마쳐야 함은 물론이고 행사 도중에도 끊임없이 음식을 필업(Fill-up)해야 하는 수고는 온몸을 파김치로 만들기 일쑤였다.

그런 내가 집에까지 와서 칼을 들고 주방에 들어가라고 하는 얘기는 휴지 없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똥 누라고 하는 것 같은 난감함이 앞서는 요구였으니까.

게다가 재빠른 칼 놀림과 세팅 실력을 인정받아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는 주목받아 가고 있었지만. 아내는 내가 이도 저도 아닌 요리사라며 투정이 대단 했었다.



나도 나 나름의 일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포부도 있었지만, 아내의 투정은 급기야 무능한 요리사라는 곳에 이르고 만다.

아내의 불만은 또 다른 곳에 있기도 했다. 매일 보는 음식에 질려 집에 오면 나는 언제나 투박한 스타일의 음식을 먹기를 기대했지만, 아내는 그렇질 않았다.

나는 청국장 하면 아내는 스파게티라고 대들고, 내가 보쌈이라고 하면 아내는 전가복이라고 외치며, 눈을 부라렸다.

사사건건 맞서던 우리 둘은 점점 지치기 시작했고, 이혼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이도 아직 갖질 않았으니 이쯤에서 홀가분하게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하자는 말에 나는 마지못해 도장을 찍었다.

이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이혼의 과정에서 수도 없이 일을 빼먹게 되고, 그로 인해 가뜩이나 밀려드는 이벤트 캐더링의 주문을 소화해 내지 못했던 나의 사정으로 인해

나는 치프(요리장)로부터 권고사직을 통고받았다. 이혼과 더불어 직장도 잃고 이름하여 나는 껍데기뿐인 백수가 되고 만 것이었다.



한두 달은 정말 꿈만 같았다. 온종일 방 안에서 뒹굴며, 매번 졸다 못해 끝까지 보지도 못하던 재밌는 영화며, TV프로 들을 아낌없이 감상할 수 있었고,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이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싸고 싶으면 쌌으니까.



그러나, 그 짓거리도 한계가 있었다.

이혼한 아내에게 아파트를 내주고 몸만 덜렁 나온 나는 나날이 까져 내려가는 통장의 잔액이 눈에 들어오면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도달하고. 요리사로서 오라는 곳은 꽤 있었지만 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이혼을 계기로 이제는 더 색다른 삶을 살아보자는 나의 의도는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곳마다 번번이 퇴짜를 맞으며, 슬며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직업소개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직장 경험은 있으세요?’



직업소개소에서 나는 요리사였다는 말을 일부러 하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단순 노무직밖에 없었다.

그것도 사람들이 밀려 있었고, 대개 직업소개소는 파출부를 구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고 있었기에

나 같은 멀쩡한 젊은이들을 위해 직업을 알선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이름하여, 직업이 이런 것이 있다고 소개 정도만 해주는 무슨 광고회사를 갔다 온 기분이었으니까.

그나마 회비라고 5만 원이나 뜯기고 여관방으로 돌아와 나는 돈만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여보세요, 정우진입니다. 어디시죠?’



못 보던 전화번호였다.



‘정우진 씨죠? 여기 직업소개소인데요, 어떤 일이라도 상관없다고 하셨죠?’

‘네.’

‘어떤 분이 남자 파출부를 찾고 계시는데 한 번 해보시겠어요? 그리고 입주도 원하셨지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실 잘 곳도 마땅치 않은데 이렇게 주야장천 여관에서 있는 돈을 까먹으면서 무작정 지내기는 더더욱 힘들었으니까.

나는 괜찮다며, 파출부 일을 승낙했다.

우선 부탁한 집에서 면접에 붙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나는 그러겠다고 우선 대답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전, 오랜 자취생활로 빨래, 청소 등은 문제가 없었고, 게다가 내가 누군가, 전직 요리사 아닌가?

호텔에서만 굴러먹던 솜씨로 한 상 거나하게 차리기 시작하면 주인집 눈에 드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자신감마저 솟았다.

나는 직업소개소에 나가서 입주하게 될 주인집의 주소와 약도를 받아 들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 집으로 향했다.

강남의 번듯한 위치에 자리 잡은 말로만 듣던 그 고급아파트가 주인집의 주소였다.



‘딩동,딩동,딩동.’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집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어디 나갔나? 헛걸음은 설마 아니겠지? 나는 다시 한번 초인종을 거시게 눌러댔다.

비디오 인터폰으로 되어 있어 내 얼굴이 안쪽에서 보일 터인데 인터폰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런데, 한참을 벨을 누르는데 누군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에이 씨발, 아침부터 누구야, 재수 대가리 없게?’

‘저. 그게. 직업소개소에서 왔는데요.’



나는 죄지은 것도 없으면서 죽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씨발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어디 여자가 식전 댓바람부터 쌍욕을 하고 지랄이야, 지랄은?

이어서 문이 덜컹 열리면서 한 여자가 현관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외국 영화에서처럼 남자 와이셔츠만을 입고서 두 다리를 모두 드러낸 채, 머리는 산발에다, 입술연지가 이리저리 번져있는 꼬락서니라니.

아마도 지난밤 술에 절어서 어떤 놈팡이와 거나하게 씹질을 하다가 이리도 중천 대낮까지 잠을 퍼질러 잔 듯이 보였다. 팔자 좋구먼.



‘어서 들어와.’



아이구 씨발이 따블로 목구멍에서 요동치네.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반말은?



‘앉아.’



나는 호화로운 이탈리아 소가죽 소파의 가운데에 조져 앉았다.

마주 보고 있는 여자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눈앞의 탁자에 있던 담배를 집어 든다. 나는 반사적으로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고.



‘매너 있는데?’



매너는 씨발, 뭐 말라비틀어진 매너?

그때, 안방으로 보이는 문이 열리면서 남자 두 명이 걸어 나왔다. 그것도 두 명씩이나 빨가벗고, 좆대가리를 덜렁덜렁 흔든 채로.

아뿔싸! 정말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놈들이 내가 있는지 없는지 벌거벗은 것도 아랑곳하질 않고

터덜터덜 걸어가 식당의 냉장고를 열고 물을 마셔대는 것이었다.

한 놈은 물도 마시기 전에 허리를 기울여 여자의 등 뒤로 기대고 그 여자의 귓불을 잘근 물면서 잘 잤느냐고 지분거렸다.



‘야! 씨발, 아가리도 안 닦고 웬 키스야, 키스는? 아휴, 씨발놈, 침에서 냄새나는 것 좀 봐.’



그래도 그놈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나에게 웃음을 날리며, 식당으로 가더니 물통을 붙잡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봤지? 내가 사는 게 이래, 생각 있어? 집도 절도 오갈 데 없다며? 집안일은 해 봤어? 여편네들을 데려다 놓으면 하루를 못 가요 글쎄. 씨발년들.’



그도 그랬을 것이다. 저렇게 온통 저지르고 다니는 여자 뒤를 아무리 돈을 받기로 서니 두 눈 뜨고 봐줄 여자는 없었을 테니까.



‘빨래, 청소, 요리 전부 다 할 줄 압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와, 일 났네, 누님, 허리 펴고 사시겠소!’



저 씹새끼 들은 왜 중간에 겐세이 끼고 지랄 들이야! 가만히 불알 내놓고 물이나 처먹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비굴하게 일을 달라고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나 자신이 측은하기만 했다. 돈이 원수지!



‘그래? 그거 잘됐네. 오늘부터 그냥 일해. 알았지?’



나는 여관에 있는 짐을 갖고 오겠다고 1시간만 기다려 달라고 얘기하고는 부리나케 택시를 잡아타고 짐을 찾아왔다.

짐이라고 해 봐야 달랑 가방 하나뿐이었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내가 가장 아끼는 레서피(recipe:요리법)가 적힌 노트가 있었기에 버릴 수는 없었다.



주인집을 나서며 받아 든 열쇠로 나는 초인종도 누르질 않고 집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집안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다 나갔나? 그런데, 나간 것이 아니었다.

안방에 딸린 목욕탕에서 물소리와 함께 재잘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고 있었다.

나는 현관 앞에 가방을 내려놓고 안방으로 슬며시 들어가 보았다.

목욕탕도 열려 있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물을 틀어 놓고 아까의 그 두 놈이랑 주인집 여자가 씹을 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아..아.씨발.정말 좋다. 더 쑤셔 봐.’



‘누님 보지는 정말 일품이네, 어떻게 보지를 쑤실 때마다 이렇게 악기 소리가 난데?’



‘씨발놈아, 좆같은 소리 하지 말고. 그게 악기 소리냐? 보지 바람 빠지는 소리지!,

악,.씹쌔야, 똥꼬 에는 뭘 좀 쳐 바르고 박지, 그렇게 얘기해도 대가리엔 똥만 가득 차서, 어후, 억억.’



열린 문틈으로 보인 장면은 가관이었다.

바닥에 한 놈이 퍼질러 앉아서 주인집 여자를 올려놓고 좆대를 위로 세운 채, 치받으며, 박아대고 있었고,

그 아가리에 입 냄새가 좆 같다던 그 새끼는 엎드려 씨근덕 대는 그 여자의 위에 올라타고 똥꾸멍에 여지없이 좆 뿌리를 들이대고 어우러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아수라장을 외면하고 방에서 나왔다.

어쩌면 저렇게 수치심이란 것을 모르고 살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까 집을 나서기 전에 일러 주었던 부엌 옆의 구석방으로 가방을 옮겨 놓고, 자리에 앉았다. 열어 놓은 문을 통해 자지러지듯이 소리쳐 대며, 박아대라고 씨부렁거리는 주인집 여자의 고함이 구석방에서도 확연히 들리고 있었다.

도대체 저런 지경이니 여자 파출부들이 붙어 있을 턱이 없어 보였다.



30분이나 지났을까? 남자들의 지글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현관 문소리가 났다.

나는 피우던 담배를 조져 끄고는 번개처럼 밖으로 나갔지만 벌써 남자들은 문을 나선 뒤였다.

나는 거실에서 열린 문틈으로 주인집 여자가 벌거벗은 채로 경대에 앉아 화장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저. 왔는데요?’

‘그래? 빨리 왔네, 그 새끼들 갔지? 배고프다, 먹을 것 좀 차려 봐.’



나는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정말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폭탄도 그런 수소폭탄이 없었다.

찬장을 열어 보니 북어포가 두루룩 떨어져 바닥으로 쏟아지고, 아까 내 방구석의 자루에 들어가 있던 파 뿌리와 마늘 몇 쪽, 양파 몇 개가 고작이었다.

뭘 처먹고 사는 건지? 나는 계란이 있어야 했지만 계란 없이 북엇국을 끓이기로 했다.

다행히 참기름과 양념통은 있었다. 냄비를 찾아 참기름에 찢은 북어를 달달 볶다가 물을 맞추고, 웬만큼 끓었을 때, 간을 한 뒤에 파를 송송 썰어 넣었다.

계란을 풀었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없는 재료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밥은 언제 해 먹었는지 알 수도 없고, 온통 냉장고 앞에는 시켜 먹는 음식점의 전화번호 스티커만 덕지덕지 붙어 있던 걸로 봐서

거의 식사를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식사하세요.’



나는 달랑 북엇국이었지만, 그녀가 해장을 원하는 것 같아서 차려 놓고도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그녀가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으로 식탁에 앉았다.



‘꽤 솜씨 좋은데? 어디서 났데? 재료도 없을 텐데.’



나는 국을 다 먹고 한 그릇을 더 달라는 그녀에게 국을 더 퍼 주었다.



‘저, 먹을 게 너무 없는데, 장도 좀 보고, 여러 가지 사게 돈을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래, 그래야지. 잠깐 있어.’



그녀는 국을 먹다 말고, 방에 들어가 백을 들고나온다. 사람들이 소형차 한 대 값이라고 입을 모으던 그 명품 가방이었다.



‘얼마나 주련?’

‘반찬거리랑 음료수, 과일, 쌀. 그리고, 뭐 여러 가지.’



그녀는 지갑에서 십만 원짜리 네댓 장을 집히는 대로 꺼내서는 나에게 내민다. 와, 죽인다!



‘나머지는 알아서 챙겨 넣어 둬. 그리고, 오늘 저녁은 먹고 들어올 거야. 내가 올 때까지는 잠 처자지 말고.’



그녀는 냉큼 일어나더니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더니 현관 앞의 탁자에서 차 열쇠를 들고 문을 나선다.



‘다녀오세요.’



아이구, 정말 좆같은 내 신세! 내가 어쩌다가 여자 배웅이나 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는지.

고개를 수그리며 현관문을 닫고 나서 나는 분하고 처량한 마음에 거실에 앉아 담배를 연거푸 세 대나 피워 재꼈다.

그러나, 그렇게 그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나는 집안을 돌아보았다.

온통 비싼 가구와 침대, 가전기기들로 꾸며져 있었고, 안방 옆의 창고 방 같은 곳을 열어 보고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 하나 가득, 옷과 구두, 가방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놓은 팬티, 브래지어도 하나하나 기십만 원은 족히 될 듯한 고가품들이었다.



우선 청소부터 해야 했다. 안방의 침대 밑은 더 가관이었다.

언제 치우고 손을 안 댔는지 먼지가 수북했고, 침대의 밑은 그녀가 벗어 놓고, 처넣은 팬티와 휴지 뭉텅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으니까.

대개는 찢어진 것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자신이 벗은 것이 아니라

아까의 그런 놈팡이들과 정신없이 어우러지면서 남자들이 찢어발기면서 벗겨졌다는 것이 상상되었다.

휴지통에는 정액을 닦은 휴지 뭉텅이, 담뱃재, 콘돔 쪼가리들, 약 껍질들이 가득 차 있었고.



나는 우선 흐트러진 옷가지들을 모두 모아 거실로 들고나와 분류했다.

물빨래가 가능한 것이랑, 드라이를 보내야 할 것들을 구분했고, 옷방에서도 널브러져 구겨진 옷 중에서 세탁이 필요한 것들을 골라냈다.

주소록을 들춰 세탁소 사람을 부르고.

내가 들고 가기에는 너무 엄청난 분량이었고, 게다가 여자의 팬티.

그것도 분비물이 잔뜩 묻은 실크 팬티 등을 한 아름 들고 가서 창피하기는 더더욱 싫었기에.



세탁물이 나가고 나는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오면서 보아 둔 대형매장으로 가기로 했다.

차가 없었기에 나는 봉투를 째지지 않도록 두 겹씩 포개고, 그것도 돈을 주고 사서 3번에 걸쳐 아파트까지 산 물건을 날랐다.

냉장고에 음식을 채워넣기 전에 나는 냉장고 청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집안에는 분리수거를 위한 비닐이 하나도 없었고, 온 곳에 먹다 남은 양주병 들이 굴러다녀서 청소하는데 만도 2시간이 넘게 걸렸다.



대충 청소가 되고, 음식이 제자리를 찾아 나가고, 나의 전문인 주방에 이제까지 없던 칼, 도마, 기타 주방용품들이 자리를 꽤 잡아나가면서

나는 세탁기를 돌렸다.

침대 시트부터 빨아야 했는데, 곳곳에 들러붙어 굳어버린 정액 찌꺼기 들은 솔로 문지른 후에 담가서 빨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아침나절부터 치우기 시작한 집안이 저녁 8시가 되어서야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나는 밥을 하고, 국을 끓이면서 나 혼자 먹을 요량이면서도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낮에는 컵라면으로 한 끼 겨우 때웠으면서도 내 성질상, 저녁은 정찬으로 먹고 싶었다.



밥이 되어가는 동안, 나는 식탁에 앉아서 거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알맞게 끓어가는 연한 된장국 냄새와 깨끗하게 치워진 거실, TV에서는 제목은 모르지만,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코미디 프로가 이어지고.

언뜻 보면 예전의 행복했던 신혼 때가 생각나 코끝이 찡해지기까지 했다.

오늘 썼던 돈을 맞추어, 영수증과 함께 남은 돈을 주인 여자의 경대 위에, 메모지에 내용을 소상하게 적어서 올려놓았다.

밥을 먹으며, 나는 이렇게 혼자 지내는 날들이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에 기대보다 일찍 식사를 관두고 밥상을 치워 버렸다.



거실에 앉아서 TV를 대하니 하루 종일 피곤한 일과로 인해 온몸이 녹녹하게 저리면서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냄새에 민감한 것 같았는데 라는 기억에, 나는 현관 옆의 목욕탕에서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 나는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성욕은 어떻게 해결하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비누칠로 좆대를 슬며시 문지르자, 곧바로 입질이 왔다.

나는 샤워를 하는 도중에 좆대를 비누칠로 연거푸 잡아채면서 딸딸이를 치기 시작하고,

거의 마지막 수순으로 다가갈 무렵, 누군가 집안에 들어서며, 깔깔대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혼자 있었음으로 잠그지 않았던 목욕탕 문을 누군가 확 잡아 열었다.



‘어?’



‘누.누.누구세요?’



나는 벌떡 선 좆이 보이지 않게 하려고 거품 묻은 손으로 아랫도리를 가리면서 문을 연 여자에게 발끈 소리쳤다.



‘소정아! 너 애완동물 키우냐? 욕실에 웬 남정네?’

‘응, 우리 집 파출부, 좆도 아냐.’



아니, 씨발, 내 눈앞에 이렇게 시퍼렇게 벌떡 선 게 좆이 아니고 뭐야, 씹인가?

그리고 또 한 번 봤으면 됐지, 느물거리면서 문도 닫지 않고 계속 쳐다보고 있는 저년은 또 뭐야?

몸을 대강 닦고 거실로 나가보니 주인 여자가 데리고 온 친구들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

아까 욕실의 문을 연 여자도 주인 여자와 맥락을 같이 하는 여자인 듯싶었고,

주인 여자는 이미 얼굴이 벌겋게 되어서 온 얼굴이 흑인처럼 검게 그을린 젊디젊은 놈팡이와 키스를 하고 지랄들이었다.

내가 나서자, 키스를 하다 말고, 풀린 눈으로,



‘야, 너 TV 좀 꺼! 일하라고 들여놨더니 좆나게 TV만 보고 있던 거야? 어서 술 좀 내와 봐, 안줏거리랑!’



내 참, TV를 아무리 열나게 눈이 뚫어져라 봐도 나오는 좆은 없더구먼, 지레 남의 좆 갖고 지랄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단출한 대답만 하고 주방으로 돌아섰다.

나는 아까 낮에 내가 먹으려고 사 두었던 골뱅이와 파무침, 그리고 소면을 금방 삶아서 골뱅이무침을 만들어 과일과 같이 깎아서 술과 함께 내왔다.



‘어머, 어머, 이것 좀 봐, 얘. 저 과일 깎아 놓은 것 좀 봐. 예술이다, 예술!’



연신 놀라는 친구와 달리 주인집 여자는 그놈과 아가리를 꿰매 놓았는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알맞게 간을 해서 무쳐놓은 골뱅이무침을 소면과 함께 먹어본 그 친구는 또다시 감탄을 하건만

그녀는 이미 남자에게 윗도리가 다 열린 채, 젖을 빨리고 있어서인지 정신이 없었다.

세 사람은 술도 먹는 둥 마는 둥, 거실에서 엉겨 붙어 옷들을 벗어 재끼면서도 내가 있는지 없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마치 너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버러지 같은 것이라는 시선으로.



놈팡이는 온몸이 근육질에 날렵한 체구의 훤칠한 키에 온몸을 선탠을 했는지 직접 해변에 가서 노릇노릇하게 구웠는지 온통 검은 빛이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어떻게 태웠는지 허옇게 남아 있어야 할 팬티 라인조차도 없었다.

주인 여자의 젖을 빨고 있는 사이, 골뱅이를 처먹던 그 친구도 가세해서 그 남자의 옷을 벗겨주고,

그로 인해 그 친구는 자기 옷도 채 벗기 전에 공중을 향해 한껏 발기된 젊은 놈의 좆을 쮸쮸바 빨듯이 맛나게 빨고 있었고.

나는 또다시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부엌 옆의 내 방으로 기어들어 갔다.

열린 문으로 그들의 섹스가 라디오 연속극처럼 내 방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나는 또 하릴없이 담배를 피워 물고 그들의 광란을 들이키며 숨을 쉬고 있다.



‘소정아, 얘 죽인다. 헌팅으로 건진 거치고는.’

‘썅년아, 너는 맨 처음에 깜댕이 같아서 싫다며? 이런 씨발, 보지 찢어지겠네, 야, 이 씨발 놈아, 좀 천천히 쑤셔, 그래, 그렇지.음. 윽윽.’

‘아유, 이 새끼, 엉덩이 탱글탱글한 거 봐. 보지깨나 울리겠네. 똥구멍이나 핥아 볼까?’

‘쌍년아, 가만 좀 있어, 똥꼬 건들면 좆심 떨어진다잖아?’



세 사람의 대화는 정말 못 들어 줄 판이었다.

가진 건 돈뿐이었고, 나이는 30줄을 넘기고 있는 그녀들은 어디에서도 주목받을 수 있는 매력은 물주라는 사실밖에 없었을 텐데,

그래도 하루가 멀다고 불나방처럼 세월을 쪼개는 저 짓거리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으니 내 참!

아마도 나이트 같은 곳에서 부킹 되기 무섭게 이곳으로 남자를 끌고 왔는가 보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쪼그려 앉은 채,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나는 잠결에 악 하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방을 나섰다. 거실에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지만 작은 전등으로 인해 그림자가 어렴풋하기는 했다.

주인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그 친구라는 여자가 소파에 엎드린 채로 있었고,

남자는 온몸이 번들거리는 땀으로 젖은 채, 뒤에서 그녀에게 마음껏 좆질을 하고 있었다.

부엌 끝자락에서 바라본 그 둘의 자세로 보아 그녀의 비명은 아마도 항문을 쑤셨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주인 여자를 발견했다.

머리를 다가서는 내 쪽으로 하고 있었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엎드려 있었는데 간간이 신음 같은 것을 흘리며 엎어져 있는 것이 심상찮아 보였다.

나는 급한 마음에 두 사람이 씹질을 하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질 않고 거실의 불을 환하게 켜면서 주인 여자에게 달려갔다.



‘잠깐만요!’



두 사람에게 잠깐이 허용될 리 만무했고, 두 사람은 동시에 불을 켠 나에게 쌍욕을 해대면서도 철벅대는 좆 질을 멈추질 못하고 있었다.

나는, 주인 여자를 안아서 일으켜 보았다. 입에서 거품 같은 것을 흘리고 있었는데, 역한 약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뺨을 때려 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꺼풀을 까뒤집어 보았지만 역시 무반응이었다.



‘이것 보세요, 큰일 나겠네, 이러다가는.’



나는 사람이 옆에 쓰러져 있는 것도 불사하고 둘이서 쾌락의 종착역을 향해 척척 대며 좆과 씹을 마주치고 있는 그 연놈 들을 뒤로 하고,

방안으로 들쳐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이불을 젖히고 오늘 빨아서 새로 씌워 놓은 시트를 벗겨서 둘둘 말아서 거실로 갖고 나왔다.

옷을 입히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급한 마음에 주인 여자를 시트로 돌돌 감아서 나를 황망히 쳐다보면서도

풀린 눈으로 별일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여자를 업고 나가는 나를 바라보는 좆같은 연놈들에게 욕을 해주며 문을 박찼다.



‘에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



나는 지나가는 택시를 붙들고 가까운 응급실로 가자고 했다. 택시 기사는 신이 났다.



‘아유, 나도 영화처럼 꼭 한번 요렇게 해보고 싶었는데, 웬일이래?’



비상등을 키고 경적을 울려대며, 신호를 무시한 채, 교차로를 무법천지로 통과하는데 옆에는 귀신같이 경찰의 사이드카가 따라붙고,

차 안의 상황을 짐작했는지 차를 세우지도 않고 도리어 자기가 앞길을 인도 하면서 응급실로 길을 틀었다.



‘워매, 신나는 거.’



응급실로 들어가 나는 약을 먹은 것 같다고 하자, 바로 위 세척을 하겠다고 알려주고는 보호자는 나가 있으란다.

밖에는 사이드카에서 내린 경찰이 나와 택시 기사에게 경위를 묻고, 몸조리 잘하라고 이른 뒤에 자리를 뜨고,

나는 급한 김에 지갑을 들고 오지 않은 관계로 내일, 이곳 병원으로 와서 병실이든, 응급실이든 나를 찾으라고 기사에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아니요, 좋은 일 하고, 나도 즐겼으니까. 돈은 무신 돈? 강남에서 신호 무시하고 나 같이 달려본 놈도 찾기 힘들 것이야, 몸조리나 잘하더라고!’



주인 여자는 수면제를 독한 양주와 섞어 빈속에 과다하게 복용한 것 같다고 의사가 말해 주었다.

미처 약이 녹기 전에 데려왔길래 망정이지 하마터면 저세상으로 갈 뻔했다는 것이었다.

그 밤이 그렇게 지나고, 주인 여자는 다음 날, 아침 늦게야 회복실에서 눈을 떴다.



‘정신이 좀 드세요?’



나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나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 있으면서 링거를 맞고 있음에도 두 손을 가려 얼굴을 감싸고 흐느낀다.

나는 더 이상 있기도 뭐하고 해서 밖을 나오려는데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다 보았다.



‘정우진 씨!’

‘어떻게 내 이름을?’

‘집에서 다 알아봤었어요. 통성명도 못 하고 못 볼 꼴만 보여 드린 것 같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요리사셨다고요?’



아마도 직업소개소에서 내 신상에 대한 것을 알려주어서 알고 있으려니 했다. 그러나, 요리사라는 것은 모를 텐데.



‘혼자 사는 제가 남자를 파출부로 들인다니까 집안에서 선생님의 뒷조사를 모두 한 모양이에요. 얼마 전에 이혼하셨죠? 기분 나쁘신 건 아닌지.’



제법 다소곳한 말투였다. 나는 입에서 걸걸한 욕이라도 한 바가지 튀어나올 줄 알고 있었는데 의외였다.



‘약은 왜 드셨어요? 그렇게 세상이 살기 싫으셨어요? 세상 살기 싫어하는 분 치고는 너무 즐기시는 것 같던데.’



나는 비아냥대는 투로 느물거렸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할 말이 없네요. 살고 싶은 마음은 정말 요만치도 없었으니까요.’

‘왜요? 생활 풍족하겠다, 놀아주는 남자들 줄 섰겠다. 마음 맞는 친구까지 겹으로 데리고 들어 오셔서 비뚫어지게 막 나가시더니.’



그녀는 대답 대신 눈물만 줄줄 흘렸다. 나는 너무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해서 이쯤에서 어투를 되돌려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그렇게도 생각하셨을 거에요. 어제 그 친구, 제 전남편 애인이에요. 그년 때문에 꼭 이혼한 거라고 볼 순 없어도 아직 미움이 가신 것은 아니죠.’

‘그런데 왜 만나고 다니세요? 싫으면 그만이지?’

‘글쎄요, 그 여자도 불쌍해요, 남편을 만나 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어제 들었거든요, 저와는 조금 다르지만.’

‘집안이 꽤 부유하신 거 같던데.’



‘부자면 뭐해요? 강남에 배밭 갖고 있다가 투기 붐 타고 떼부자 된 인간들 아시죠?

다 그렇고 그런 속물들로 탈바꿈해서, 돈들은 있을지 몰라도 평안한 가정은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저희 집안도 마찬가지 구요.

돈, 그거 별거 아니에요. 다들 잘 사는 것처럼 보이죠? 집도 돈으로 사고, 명예도 돈으로 사고, 학벌도 돈으로 사고, 심지어 사위나 며느리도 돈으로 사고.

우리 남편도 돈으로 산 허울 좋은 사법연수생이었죠.

열쇠를 몇 개나 안기고, 집이며, 자동차며, 시시때때로 갈아줘.

안 해 준 것 없이 다 해 주었는데도 무엇이 모자라는지 우리 집안은 대갈통이 바보라며, 냉큼 돈이나 챙기더니만 이혼해 버리더라고요.

실제로는 바람이 난 거였지만 서도.’



그녀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부모 밑에서 저렇게 속물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개차반으로 살아왔는가 싶었다.



‘저. 보기에 막 산 것 같죠? 지금은 그렇지만 이혼하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어요.

남편밖에 모르고 우리 집안의 근본 없음이 부끄러워 어디 밖에 입도 뻥끗하지 않고 살았었죠. 그런데, 그런 정성만으로 남편을 붙들기가 쉽질 않더군요.

남편은 주머니에 가득한 돈 때문인지, 밖으로만 돌고, 나는 집안에서 저 혼자 미쳐 돌아가고. 보다 못한 친정 부모님이 이혼을 강제로 시켰던 겁니다.

그 덕에 위자료는커녕 그 잘난 변호사 혀를 놀려 가며, 자기가 당한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하라며 한 재산, 뭉텅 또, 뺏기고.’



그녀의 타락은 그 알량한 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보다도 이렇게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냥 정신 나간 년처럼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죽긴 왜 죽어요? 세상은 그래도 살아볼 만하다고 누가 그래지 않았습니까?’

‘무슨 희망으로 살겠어요? 참, 선생님도 이제 일하고 싶지 않으시면 관두셔도 돼요.

저 같은 년이야 또 그렇게 살다가 제풀에 지쳐 또 약 처먹고 뒤질 날만 기다리겠죠. 뭐.’



‘저도 이혼했을 때는 나만이 이 세상에서 뒤처진 것 같고, 나만 괴로운 것 같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래도 그렇지, 자신을 그렇게 자학하면서 사는 법이 어디 있답디까? 서로서로 의지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아도 시원찮을 판에,

그런 놈팡이 들은 이제 소정 씨의 돈만 보고 날려들 뿐이지, 사랑 같은 것은 애초에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왜 모르세요? 제 말이 틀렸나요?’



‘아뇨, 맞아요, 그렇지만, 이제는 갈 때까지 다 간 것 같은 제 생활을 이해하고, 상처를 감싸 줄 사람을 찾는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란 말도 있잖아요? 사람이 사람으로 인해서 생긴 상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법이에요.

사람만이 그 상처를 꿰매어 줄 수 있는 겁니다. 몸을 죽이는 약으로 인생을 끊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셨던가 본데, 이건 어떠세요?

사람을 한번 드셔 보시는 것은 어떨는지?’



‘사람을 드시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떠냐는 얘기에요! 어휴, 답답해. 저 이래 봐도 살림 잘해요. 서로가 이혼도 해 봤고, 인생 쓴 경험도 해 봤으니

굳이 과거를 문제 삼을 것도 없고,

아이도 없겠다,

다시 한번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요?

저도 요리사로서의 길을 다시 걸으면 도움받지 않고, 우리 두 사람, 입에 풀칠은 할 거예요. 예전처럼 풍족하게 사실 수는 없어도.’



나는 괜한 제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보셨잖아요? 저 이미 갈가리 찢어져 더러워 질대로 더러워진 몸이에요.

더 이상 돌아보고 자시고 할 건더기가 없는, 그런 년이라고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글쎄요.. 저는 요리를 할 때마다 제 도마 위에 오르는 식자재를 쳐다보면서 드는 생각이 한가지 있어요.

이렇게 싱싱하게 다듬어져 올라온 이 식재료들도 예전에는 쓰레기로 버려졌었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말이지요.

요리도 세상사와 똑같아요.

사람들이 갖다 버린 음식 찌꺼기가 다시 땅으로 스며들어 싹이 나고 줄기를 내어, 다시 사람의 식탁에 맛깔스러운 모습으로 자리하는 걸 보면 말이죠.

소정 씨가 지금 자신을 쓰레기라고 불렀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어제를 기점으로 소정 씨는 다시 맛난 음식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땅에 뿌려져 싹이 돋고 있는 풋풋한 식자재라고.’



그녀가 울면서도 웃음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은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기보다 자신을 이해하여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퇴원하고 나서 그녀와 나는 예식도 없이 그렇게 같이 살고 있다.

한번 부서졌던 둥지를 새로이 틀려면 예전보다 더 꼼꼼히 살펴야 한다고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그녀와 내가 새로운 둥지를 꾸미면서도 뒤를 돌아볼 겨를은 없어 보였다. 살기 바쁜 세상 아닌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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